달라도 너무 다른 부부의 여행기
“10월에 우리 푸껫으로 여행 가자."
퇴근한 남편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한 마디. 갑자기 여행을 가잔다. 기간을 콕 집어서 그 장소에 가야 한단다. 여행 좋지. 평소 같았으면 좋아하며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다. 하지만 10월은 부담스럽다. 중요한 일들이 빼곡히 스케줄에 담겨 있다. 12월에 있을 아이의 전시회 그림을 마무리해야 하고, 공저출판 프로젝트 원고 마감도 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다음에 가도 되지 않을까. 10월에는 일이 많아서 막상 가도 마음 편하게 즐기기 어려울 거 같은데.
뜨뜨 미지근한 반응에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남편은 솔직한 이유를 말한다. 골프를 치는 동료들이 그 시기에 푸껫으로 놀러 간단다. 하루는 그 들과 골프를 치고, 다른 날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그럼 이번에는 그분들과 골프 치고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하니, 집에 있을 나와 아이에게 미안해서 안된단다. 그리고 며칠 내내 골프 치고 술 먹고 하는 게 싫단다. (그게 진짜 이유였군요) 같이 가면 호텔에서 쉬면서 수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그럼 그렇지. 골프와 가족 여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생각이었던 거다. 이미 발동이 걸려있으니 쉽게 막을 수는 없을 거 같다. 하긴 코로나 이후 해외여행을 못 갔으니 나쁠 건 없겠지.
"아유. 그래. 알았어. 그럼 가는 걸로 하자."
막상 여행날짜가 다가오니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막둥이 고양이 케어를 어떻게 하는가였다. 5일 내리 집을 비워야 하는데, 가뜩이나 엄마 껌딱지 고양이는 스트레스를 엄청 받을 게 분명하다. 펫시터 분을 불러야 하나, 동물병원에 맡겨 부탁해야 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겁이 많아 병원에서 밥도 물도 안 먹을게 뻔하니 패스.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는 건 불안하니 펫시터 업체도 패스. 다행히 동네 엄마와 아이 친구가 도움을 주기로 했다. 하루에 한 번 집에 와서 물을 갈아주고, 자동급식기와 화장실 청소도 해준다는 말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제 고양이는 해결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준비물을 챙겨 본다. 갈아입을 여벌 옷, 세면도구, 화장품, 선크림, 체온계, 상비약, 수영복, 튜브, 구명조끼, 샌들, 슬리퍼, 핸드폰 충전기, 노트북, 여권, 와이파이 도시락 등등. 각각 비닐팩에 담아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는 모습을 보더니 남편은 우리 이민 가는 거냐고 하더라. (으이그. 그럼 여행을 그냥 쉽게 가는 거라고 생각했나요)
공항 주차 대행 서비스를 예약하고, 푸껫 공항에서 호텔로 갈 밴 예약은 남편에게 부탁했다. 3일을 보낼 호텔의 위치와 공항까지 거리 및 소요시간, 수영장의 위치와 운영시간, 호텔 조식 운영시간과 제공되는 음식들 등을 미리 네이버와 호텔 사이트를 통해 체크했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 카페, 약국, 추천 맛집 등을 찾아 리스트로 정리해 메모장과 카톡에 남겨두었다. 그런 모습에 남편은 참 피곤하게 산다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A, B, C 플랜까지 세워두어야 마음이 편한 걸 어떡하나.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까지도 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건, 남편에겐 비밀이다.
푸껫에 도착. 본격적으로 남편의 여행이 시작된다. 즉흥적인 남편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대로 일정을 진행한다. 조식을 먹으며 오늘 뭐 하냐고 물어보니, 우선은 호텔에 왔으니까 수영을 먼저 해야 한단다. 그리고 이따 배고프면 밥 먹으러 나가면 된다고. 실컷 수영을 하고 난 후, 배가 고프다고 징징 대는 아이와 걸으며 그제야 구글맵을 켜고 식당을 찾는다.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이 살짝 오르려는 찰나, 지나가다 맛있어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잔다. 에어컨 있냐는 말에 글쎄 가보면 알겠지 하며 웃어넘긴다. (다행히 에어컨이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시원한 바람 아래에서 메뉴를 보고 끌리는 대로 주문을 한다. 음식이 나오고 한 입을 먹는 순간, 말도 안 되게 너무 맛있다. 오히려 내가 골랐던 식당들 보다도 더. 그때는 참 억울하다. 이 사람에게는 맛집을 찾는 탁월한 감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씩 웃으면서 그거 보라고, 맛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남편이 살짝 얄밉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맛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식당 선택은 늘 남편의 몫이다.
우리의 여행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나에겐 일정을 앞두고 준비하는 것부터가 여행이라고 한다면, 남편에겐 현지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하는 게 여행이다. 생각해 보면 난 출발하기도 전부터 이미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예상 못한 돌발 상황에 스트레스도 쉽게 받는다. 그러니 정작 여행지에 도착하면 이미 반은 지쳐있는 상태인 거다. 그에 반해 남편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라는 관점이기에, 충분히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계획이 변경되어도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수정을 하면서 흐름을 술술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이렇게 서로가 너무도 다른 우리이지만 서로에게 기대는 부분도 분명 있다. 나의 꼼꼼한 짐 싸기 덕분에 케리어 2개를 위탁 수화물로 부치고 가벼운 손으로 기내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빠뜨리고 온 게 없기에 현지에서 불필요한 비용을 낭비하지 않았다. 준비한 여러 벌의 옷이 있어 항상 뽀송한 옷을 입었다. 상비약이 있어 호텔에서 감기기운이 있을 때, 피부 트러블이 있을 때에도 응급처치가 가능했다.
즉흥적이고 유연한 남편 덕분에 여행지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길거리 현지 식당에서 인생 쏨땀과 팟타이, 똠양꿍을 만났다. 이 식당에서 아이는 똠양꿍에 밥을 말아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수영장에서 아이와 즐겁게 놀아준 덕분에 잠시 선배드에서 낮잠을 즐기는 여유를 누렸다. 해 질 녘 코랄 빛 하늘 아래에서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던 경험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준 남편, 고맙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지만 서로를 인정하기에 함께 맞추어 나가고 있다. 내게 부족한 유연함은 남편이 보완해 주고 남편에게 필요한 계획성은 나에게 있으니, 다른 성향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상황을 맞딱 뜨리더라도 순탄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다시 깨달았다. 이 사람과는 어디에서도 살 수 있겠다고, 어느 때나 믿고 의지 할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없는 점을 지닌 그의 모습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닮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마흔에 들어서니 J형에서 점점 P형으로 옮겨지나 보다. 그렇지만. 여보. 당분간 갑작스러운 여행은 살짝 미뤄둡시다. 우리.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이다
레프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