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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킴 Oct 30. 2020

15. 포효하는 한 마리 짐승이 되다

만만치 않았던 자연주의 출산

2017.11.17 

출산 예정일이 하루 지났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게 몸이 뻐근하고 골반과 허리 부분이 묵직하면서 밑이 빠질 것 같았다. 누워만 있고 싶었지만 순산을 위해 1시간 정도 광안리 산책을 한 후에야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 남편과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밤 9시쯤 평소보다 강한 약 1분간의 배뭉침이 5~10분 간격으로 시작되었다. 통증은 없었고 배꼽 주변으로 근육이 1분 정도 수축되었다가 스르르 풀리는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올 것이 왔구나!' 막달에 바짝 연습했던 히프노버딩 호흡법인 수면 호흡과 느린 호흡을 반복하며 규칙적으로 오는 자궁의 수축과 이완을 보냈다. 낮잠을 자서 그런지 자고 있는 남편 옆에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는 않았다. 새벽 2시쯤부터는 수축 시간이 1분 30초 정도로 늘어나고 간격은 4~6분으로 좁아졌다. 이때부터는 수축이 올 때마다 허리와 골반쪽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히프노버딩 명상 음성 파일을 들으며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이완하려고 집중해야 했다.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함께 호흡을 해 주며 라이트 터치 마사지로 이완을 도왔다. 새벽 5시가 되자 수축은 2분 동안 지속되었고 간격은 3~5분으로  좁아졌다. 자연주의 출산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조산사 선생님께서는 날이 밝으면 아침식사를 든든히 한 후 센터에 오고 싶으면 와도 좋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출산 가방을 점검하고, 출산하면서 한 동안 머리도 못 감을 테니 마지막으로 샤워하지 한 후 아침 9시쯤 병원으로 향했다. 


2017.11.18 출산 당일


09:30

병원 5층에 있는 자연주의 출산 센터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20여 분간 태동검사를 했고 자궁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내진을 했다. 1cm도 안 열렸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3cm가 열렸다고 했다. 그런데 내진을 한 조산사 선생님께서 집에 갔다 와도 되겠는데 그렇게 하겠냐고 물었다.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다. 


"밤새 진통하느라 한 숨도 못 자고 참고 참다 이제야 병원에 도착했는데, 네?! 집으로 가라고요?" 


나는 규칙적인 수축이 올 때마다 허리와 골반이 너무 아팠다. 그렇다. 분명히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리 히프노버딩 책에서 배운 대로 호흡을 해도 통증은 실재했다. 집이 그리 가깝지도 않기에 출산 센터에 있는 것이 더 마음에 편하겠다고 남편과 합의하고 가족 출산실로 입원 수속을 진행했다. 


막달부터 매일 들으면서 호흡 연습했던 출산 배경음악과 아로마 램프에 라벤더 향을 피워놓고 남편과 둘이서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며 진통 시간을 보냈다. 짐볼 위에 앉아서 골반을 움직이기도 하고, 소파에 기대어 남편의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틈틈이 바나나와 에너지바를 먹으며 당을 보충하고 물도 마셨다. 조산사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출산 계획서에 써낸 대로 최대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었다. 가끔씩 노크를 하고 들어와서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 봐 주시고 진통에 도움될 자세를 코칭해 주셨다. 점심밥을 먹겠냐고 했지만 도저히 밥을 먹으면서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안 먹겠다고 했다. 받아놓고 남편이라도 먹으라고 할 걸. 남편도 새벽 2시 반부터 한숨도 못 자고 내 곁을 지키며 돕고 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밥도 한 끼 못 먹었다. 


14:30

수축은 2분 30초 정도 지속되었고 간격은 3~5분이었다. 첫 진통이 느껴진 시점부터 15시간 반 동안 소리 한 번 안 내고 호흡을 잘하고 있었는데, 이 시점부터는 나도 모르게 "우~~~~"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들으시더니 조산사 선생님께서 바로 들어오셨다. 내진을 해보겠냐고 물으셨다. 나도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지금쯤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러자고 했다. 6cm가 열렸다고 하셨다. 겨우? 조금 실망했다. 초산은 출산까지 평균 12시간을 진통한다고 해서, 나도 12시간 정도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예상을 했었는데 이미 그 예상 시간을 초과하고도 6cm밖에 안 열렸다니,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태동검사는 20분 동안 누워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도저히 못하겠어서 잠시 아기의 심박동을 들었다. 아기는 잘 있었다. 촉진제, 무통, 수액 등 아무런 의료적 개입 없이 나와 아기는 서로에게 호르몬으로 소통하며 서서히 점진적으로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나를 낳는 시절에는 무통이란 것도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진통을 견뎌야 했는데, 그때는 남편은 분만실에 들어오지도 못했기에 혼자서 진통을 했어야 했다. 나는 남편이 이렇게 열심히 도와줘도 너무 힘든데, 엄마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눈물이 났다. 고생해서 낳았더니 딸이라는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는 찾아오지도 않았고 아빠는 기분 내러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갔다고 했다. 내가 갑자기 울자 남편이 놀라서 어디 아프냐고 괜찮냐고 걱정을 했다. 물론 진통 때문에 몸도 아팠지만 혼자 나를 낳았을 엄마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다.  


16:00

수축은 3분~3분 30초 동안이나 지속돼있고 그 3분여간의 시간 동안 허리와 골반이 뒤틀리듯 조여왔다. 지난 2시간 동안 "우~~~~"하던 소리가 "으악~~~~~"으로 바뀌자 조산사 선생님이 급히 들어오셨다. 내진을 하기 위해 잠깐 누워보지도 못 할 정도로 아파서 내진은 생략하고 아기가 잘 있는지 잠깐 심박수만 들었는데 역시 아기는 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기를 생각할 틈도 없이 아파하기만 했다. 남편이 거듭해서 호흡을 잡아주려고 노력했지만 히프노버딩 호흡법 따윈 한 장의 종이조각이 되어 구겨져서 나의 의식 너머로 버려졌다. 나는 한 마리의 포효하는 짐승이 되어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남편은 기나긴 수축이 나의 허리와 골반을 뒤트는 동안 골반을 꽉 조여서 압박해주는 감통 밖에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자연적인 진통이었기 때문에 수축 사이사이에 쉬는 시간도 있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때마다 호흡을 다잡으며 파도타기 하듯 밀려오는 파도를 하나둘씩 넘어갔다. 


17:30

'포옥~~~'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양수가 터져 나왔다. 마치 뱃속에서 물풍선이 터져 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편이 허겁지겁 조산사 선생님을 모셔왔고 양수 색깔이 정상인지 확인했다. 그나마 수축 사이사이에 있던 쉬는 시간도 없이 미친 듯이 파도가 밀려왔다. 출산센터에 수중 감통을 할 욕조 시설은 없었지만 변기와 마주 보고 앉아서 남편이 샤워기로 나의 허리를 향해 따뜻한 물을 뿌려 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확실히 통증이 덜 느껴졌다.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훅 하고 변의가 느껴지면서 나도 모르게 마치 대변을 볼 것 같이 항문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델이 말한 그 압박감이 분명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기 머리가 자궁 경부에 진입한 것을 알아차리고 금방이라도 아기가 미끄덩하고 나와 변기통에 빠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물을 뿌려주고 있던 남편에게 "THE BABY IS COMING OUT!!!!!!!!” 아기가 나오고있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하얗게 질려 샤워기를 던지고 뛰쳐나가서 조산사 선생님을 불러왔다.  


18:00

드디어 자궁 경부가 10cm 다 열렸다고 했다. 출산하기 전에는 힘주기 할 때가 가장 힘들고 아플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거짓말처럼 기나긴 고통이 멈췄다. 오후 2시 반부터 3~4시간 동안 수축이 올 때마다 터져 나오던 신음과 포효도 멈췄다. 5~10분마다 한 번씩 변의가 느껴지는 압박감이 느껴질 때마다 항문에 힘이 들어갔다. 히프노버딩 하강 호흡으로 힘주지 않고 아기를 자연스럽게 내려 보낼 계획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다니 이것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힘을 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조산사 선생님께 힘주기를 코칭해달라고 부탁했다. 압박감이 오고 힘이 들어갈 때마다 남편이 나의 뒷목과 등을 받쳐 상체를 살짝 세워주면 배꼽을 바라보며 힘이 들어가는 부분인 항문에 힘주기를 10초 동안, 재빨리 호흡을 들이마시고 다시 10초 동안 이렇게 두 번 힘주기를 하니 압박감이 파도가 지나가고 다시 휴식시간이 왔다.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남편이 생수병에 빨대를 꽂아 쉬는 시간마다 생명수를 줬다. 힘주기 세 번 정도만 하면 애가 나오는 게 아니었는가? 어느덧 힘주기를 시작 한 지 1시간이나 흘렀다. 도대체 끝은 어디인가. 내가 임신 기간 내내 운동으로 체력을 다져 놓지 않았다면 이미 포기했을 만큼 고되고 길었던 출산의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00

힘주기를 할 때 드디어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적이었다. 남편도 아기 머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이제 끝났다며 더더더 힘을 줘보라고 외쳤다. 하지만 압박감의 파도가 지나고 휴식시간이 오자 분명 나의 질 입구에서 시커멓게 보이던 아기 머리가 쏙 들어가 버렸다. 아기 머리가 보이면 뿅 하고 출산이 끝나는 줄 알았던 남편은 절망했다. 뭔가 잘 못 된 것이 분명하다고. 아기가 질에 끼여서 질식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연스러운 출산 과정의 일부 일 뿐이었다. 그렇게 아기 머리는 밀당을 하듯 파도와 함께 보였다가 파도와 함께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20분쯤 지났을까. "과장님 콜!" 하는 소리가 들렸고 여러 가지 장비들이 막 들어왔다. 내가 힘주기를 하고 있던 침대는 조산사 선생님 두 분과 간호사 선생님의 능숙한 손길을 거치더니 분만대로 변신했다. 그리고 드디어 초록색 가운을 입은 당직 과장님이 등장하셨다. 담당 과장님이 아니셔서 조금 실망했지만 드디어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실망보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그는 어김없이 밀려오는 압박의 파도에 한 시간 반 째 힘주기를 하고 있는 나의 처량한 상태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산모님, 회음부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열상을 입을 것 같은데 아래로 조금만 절개를 하면 아기도 금방 잘 나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조금 절개를 하는 게 어떨까요?" 회음부 절개 또한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남편과 상의하고 말 것도 없이 지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네, 네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남편은 과장님이 갑자기 매스를 들자 한 대 때릴 기세로 말리려고 했다. "자기야, 어떻게든 아기가 빨리 나온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 회음부 절개해도 괜찮아"라고 달래는 동안 회음부에 국소마취 주사 바늘이 따끔따끔하며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다시 압박의 파도가 찾아왔고 이번에 아기 나온다는 과장님은 말씀에 연속으로 세 번 힘주기를 하자 미끄덩하고 따뜻한 아기가 내 몸 밖으로 나왔다. 


병원에서 찍어 준 로건이의 첫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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