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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킴 Feb 16. 2021

16. 스물세 시간 만에 맛 본 황홀함

첫 자연주의 출산

2017년 11월 18일 저녁 7시 38분, 한 시간 반 동안의 힘주기, 첫 진통으로부터 약 23시간이 지나서야 우리의 첫아기, 크루즈 로건이 세상으로 나왔고 곧바로 내 배 위에 올려졌다. 조산사 선생님들은 나의 배 위에 올려진 로건을 닦인 후 덮어주고 모자를 씌우고 석션을 했다. 아기와의 첫 만남에 감동의 눈물이 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이완이 되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숨 쉬듯 길게 내쉬며 내가 바라본 것은 아기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남편도 아기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고 그의 큰 두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흐르고 있었다. 


"You did a great job.” 자기 잘 해냈어


이 출산은 분명 나와 남편이 함께 한 업적이 분명했다. 남편도 지난 23시간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수축과 압박의 파도가 올 때마다 나와 함께 하나하나 넘어온 출산의 주체였다. ‘우리가 아이를 낳았구나’ 그제야 우리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가 출산을 했다는 현실이 선명해졌다. 내 배 위에 올려져 꾸물대는 로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쭈글쭈글하지만 벌써 부릅뜬 두 눈 가에는 쌍꺼풀이 선명했다. 우리는 로건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 보고 싶었어 우리 로건이. 수고했지. 만나서 반가워"


태맥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 남편이 탯줄을 잘랐다. 얼마 후 마지막 한 번의 약한 압박의 파도가 왔고 태반이 자연스럽게 만출되었다. 회음부 봉합을 하는 동안 살짝 따끔거렸지만 아직 국소 마취가 되어있는 상태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후처치가 모두 끝나고 조산사 선생님은 모유수유를 해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 와중에 불만 섞인 목소리로 응석을 부렸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출산을 했는데 모유수유는 남편이 좀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참 웃기다. 분만대로 변신했던 침대는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조산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옆으로 돌아누워 가슴을 열고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방금 태어난 신생아는 어디서 배웠는지 내 유두에 코를 갖다 대자 덥석하고 물어 힘차게 빨았다. 양 쪽 모두 15분 정도씩 물린 후 미역국 정찬이 도착했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남편이 그동안 캥거루 케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로건은 피곤한 지 편안한 지 금세 새근새근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2~3시간 동안 모든 의료진들은 다 나가고 오롯이 나와 남편 그리고 로건, 이렇게 셋이서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시간을 맞았다. 


출산 후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샘솟아서 황홀한 기분을 느낀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다. 출산 직후 모유수유로 호르몬이 더욱 촉진되기도 했고 마침내 밥을 먹으니 힘도 솟았다. 23시간 동안의 고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통은 실재했지만 마치 그 고통을 충분히 보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출산의 순간부터 세 식구가 된 우리 가족의 첫 2~3시간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잠든 로건을 바라보며 속닥속닥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밤이 깊어가자 이제 1인실 병실에서 남편과 편하게 잠을 좀 청하고 싶어 조산사 선생님을 불렀다. 남편 배 위에서 푹 자고 있던 로건은 그새 아빠 배 위에 태변도 시원하게 봐놓았다. 남편은 초콜릿 색깔의 향기로운 첫 똥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아빠 신고식을 치렀다. 보통 출산 직후에 아기 몸무게를 재고 각종 검사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출산 계획서에 요청한 대로 그제야 로건의 신체사이즈를 측정했다. 3.48kg의 적지 않은 몸무게였다. 우리가 병실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로건은 그제야 신생아실에 내려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남편은 나를 병실에 데려다주고 병원 밖에 나가 먹을 것을 좀 사 먹고 들어왔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모유촉진차를 우려 마시고 잠을 청했다. 


병실에 올라와서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두컴컴한 병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첫 수유 콜이다. 100% 모유수유를 하겠다는 요청을 하기는 했지만 좀 너무했다. 나는 병실 복도를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생아실로 내려갔다. 간호사에게 모유수유 코칭을 부탁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젖을 빨다 지쳐 잠든 로건을 한참을 안고 바라보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 뱃속에 있던 생명체가 이렇게 나와있는 걸 보니 너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나저나 이렇게 몇 시간마다 수유 콜을 받아 오르락내리락할 바에는 병실에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모자동실을 요청했다. 감염의 우려로 한 번 모자동실을 시작하면 다시는 신생아실에 보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를 해야 한다. 이틀 정도 입원 해 있는 동안 로건을 계속 곁에 둘 각오를 하고 날이 밝자마자 로건이를 병실로 데리고 올라왔다.  하루에 한 번 간호사가 병실로 와서 아기 상태를 봐주었다. 


미리 소개받은 출장 유방 마사지사를 병실로 불러 모유가 잘 돌게 하는 마사지도 받고 모유수유 코칭도 받았다. 로건이는 대체적으로 잘 잤고 나는 깨는 틈틈이 젖을 물렸지만 아직 유즙이 조금 나오는 정도였다. 남편은 아기 기저귀를 가는 법이라든지 속싸개 싸는 법을 유튜브에서 즉석으로 배워 실습하기 시작했다. 출산은 임신기의 졸업과 동시에 육아 학교로의 입학이었다. 임신 기간부터 함께 출산을 준비했기에 자연스럽게 남편도 동시에 육아 학교에 입학했다. 남편에게 육아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다. 도와주는 것이 아닌 함께 하는 것. 


출산은 임신기의 졸업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동시에 육아학교에 입학했다 (예교원 맘스 칼리지 1기 수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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