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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Dec 08. 2020

버리는 여자와 쟁이는 여자의 동거

생각보다 잘 살고 있습니다 _ 에피소드 10 

인테리어 잡지에 단골 테마로 등장하는 텅 비다 못해 휑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 명상 선원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는 방석 하나, 무서우리만큼 새하얀 주방에 그릇 하나, 식탁도 없이 밥상이자 책상이자 작업대가 되는, 접어서 벽 사이에 끼울 수 있는 교자상 하나, 벽지와 마루를 비롯한 실내는 모두 연한 우드톤…. 이런 식의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은 생각보다 많고, 특히 제정신이라면 아이와 반려동물이 있는 집에서 미니멀리즘을 꿈꿀 수 없다.


그런 내가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온 후 지금까지 이사한 것을 세보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많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외국에서 살아본 네 번의 이사를 더하고, 아직 내 집이 없는 눈물 가득한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내 인생에 더 몇 번의 이사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최소 이 년 간격으로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반복하며 보낸 세월 덕분에 싫어도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버리는 삶은 호쾌하다. 이혼할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만 빼고 결혼과 관련된 건 거의 다 버렸으니까. 딱 한 번 입고 장롱에 처박아둔 터무니없이 비싼 예복과 한복, 결혼할 때 예물로 받은, 실용성은 1도 없었던 핸드백과 결혼 앨범 등등. 버리는 데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깨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증명서도 같이 버렸다. 그것만 챙겨뒀더라도 힘들 때 팔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이제 자유다, 라는 느낌으로 죄다 버리고 이민 가방 두 개에 넣을 수 있는 짐만 꾸려서 영국에 다녀왔다. 귀국한 후 살림살이는 다시 불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사 가는 집마다 그 전까지 멀쩡하게 잘 살던 주인이 집을 판다거나 본인이 다시 들어와 살아야 한다며 나가달라고 하는 통에 이 년 주기로 버리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그렇게 버리는 습관을 들이면서 미니멀리즘의 교과서 같은 책들을 통해 정리 요령을 배우고 영감을 받다 보니,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은 하나씩만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온 집 안을 헤집으며 두세 개씩 있던 국자니 가위니 하는 자잘한 물건들을 싹 버렸다. 그러다 얼마 못 가 쓰던 물건이 망가져 다시 허겁지겁 사들이며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다고 후회했고.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버리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릴리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다. 영국에 갈 때 어린 릴리가 삐뚤빼뚤 써준 편지와 카드, 릴리가 준 선물들, 장난감 같은 것들은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 갔다 와서 써야 할 가재도구와 전자제품을 유료 창고에 넣었는데 한 달 이용료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쌌다. 그러다 보니 심정적으로 소중한 물건들을 지킬 여유는 없었다. 릴리의 인형들만 빼고(어린 릴리도 그건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리는 습관이 들어버려서 어버이날에 받은 릴리 이용 쿠폰(설거지, 안마, 소원 들어주기 등등), 생일과 어버이날 카드, 릴리가 접어준 카네이션, 릴리의 그림들, 릴리가 용돈을 모아서 사 온 생일선물(더는 쓰지 않는)을 이사 갈 때마다 버렸다. 릴리가 몰래 섭섭해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나와 달리 릴리는 남이 길에 버린 물건까지 주워 오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아빠를 닮아, 방에 들어가면 언제나 한숨부터 나온다. 작은 침대 위에 갖가지 크기와 모양, 역사를 자랑하는 릴리의 인형들이 다양한 포즈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데, 그 틈에 간신히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하는 릴리를 볼 때마다 달인의 묘기를 보는 것 같다.

일러스트 _최연주

그게 다가 아니다. 방탄소년단의 온갖 굿즈가 방 안을 꽉 채웠고, 벽이란 벽은 방탄 포스터로 도배가 됐다. 거기다 화장대와 책상에까지 온갖 화장품 샘플들과 내가 물려준 명품(!) 립스틱들까지 욱여넣었으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이건 그나마 애교라도 있는 수준이다. 몇 달 전에 릴리의 쟁이는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영국에서 돌아와 한동안 아주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산 적이 있었다. 조류 독감이 유행했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릴리가 하굣길에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아파트 화단 바닥에 죽어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어린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지극했던 릴리는 작은 새가 너무 불쌍해 그냥 둘 수 없어서, 주워 와 자기 방에 있던 보물 상자(주석으로 만든 쿠키 상자) 안에 손수건으로 싸서 고이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릴리가 하는 말.

 “근데 새는 나중에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안 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으악!” 소리가 나왔다. 대체 그 죽은 새는 어디 갔을까? 나는 왜 그동안 릴리 방에 죽은 새가 고이 모셔져 있다는 것도 몰랐지? 릴리는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다 잦은 이사로 그 상자가 어느 틈에 없어졌다고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이렇게 미니멀리스트 엄마와 호더 딸의 동거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기 마련이다. 몇 년 전 릴리가 어버이날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TV 홈쇼핑에서 소파 앞에 두는 스탠드형 트레이를 팔았는데, 무척 편리해 보여서 그걸 사달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이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걸 알자 릴리는 기꺼이 콜을 외쳤다. 며칠 후 배달된 트레이는 TV에서 보던 것과 달리 하루 종일 술에 절어 있는 주정뱅이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딸의 선물이니 고맙게 받았는데 그 후에 일이 터졌다.


우리 집에 놀러온 지인이 그 트레이의 조잡함에 놀라 좀 더 튼튼하고 그럴싸한 트레이를 사서 선물한 것이다. 두 번째 트레이가 집에 왔을 때 소파 앞에 놓아보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집에 같은 물건이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없지. 저건 흔들거리니 버려야겠다.”


그때 옆에 있던 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그렇게 다 버려야 해? 같은 물건이 두 개 있으면 뭐가 어때!” 

그러더니 버럭 신경질을 내며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릴리의 선물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우리 집 소파 앞에는 튼실한 트레이와 덜렁이 트레이 형제가 있다. 그동안 몸에 익은 습관 때문에 두 개의 트레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지만, 영웅적으로 참고 있다. 그 일로 아직까지 릴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정식으로 하지 못하고 네가 준 선물들을 잘 쓰고 있다는 걸 은근히 어필하며 간접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은밀한 꿈을 꾸고 있다. 릴리가 외국에 나가면 스무 살이 되어가는 저 수많은 인형들을 조용히, 하나씩 릴리 모르게 보내줄 계획을 세우며 조용히 웃고 있다. 방학 때 집에 올 릴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씩, 천천히 떠나보낼 그날을….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1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박산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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