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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Dec 03. 2020

파이팅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 9

야들야들하고 촉촉하면서 탱글탱글한 자태를 뽐내는 족발을 앞에 두고 릴리는 이렇게 내뱉었다.

“내 인생 최악의 여름이야.”


2020년을 앞두고 나에게 계획이 있었듯, 릴리도 그랬다. 아니, 굳이 계획이랄 것도 없이 그저 무한 노력, 무한 체력에 부모의 무한 지원(재정적, 심정적)까지 합쳐서 오랜 목표인 일본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모녀는 각자 다른 의미로 어금니 콱 깨물고(나는 돈을 벌고, 릴리는 그 돈을 쓰면서 공부하고) 올해만 버티자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내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코로나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끊긴 작업 의뢰를 초조히 기다리는 동안, 릴리는 그만의 위기 속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변덕이 죽 끓는 듯한 등교 일정에 맞춰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꼬박꼬박 학교에 가는 와중에, 유월로 예정된 유학 시험이 취소됐다는 날벼락이 덮쳤다.


결국 십일월 시험 한 번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니, 뭐 이런 일이 있냐며 릴리는 울음을 터트렸지만, 곧 씩씩하게 원서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무려 한 달 동안 영혼까지 갈아 넣어 준비한 원서를 보냈는데, 유학원 실수로 서류가 하나 빠지는 바람에 대학에서 접수를 허락할 수 없다는 두 번째 청천벽력이 찾아왔다. 릴리는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오히려 상심한 나를 달랬다.

“괜찮아, 내가 회복력 하나는 짱이잖아?”


그런 릴리가 평소엔 없어서 못 먹던 족발을 차갑게 바라보며 “내 인생 최악의 여름”이라 중얼거렸을 때 “그래, 올여름이 참 그러네”라는 대꾸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좀 더 신경 써서 챙길걸. 돈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빚을 내서라도 비싼 학원에 보내줄걸.’ 무엇보다 가장 큰 후회는 아침마다 학교 가는 아이에게 눈치도 없이 “파이팅!”이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알량한 문자 한 통 보내놓고 안심하지 말고 아이의 몸과 영혼을 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올 한 해로 네 인생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건 네 인생에서 프롤로그의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대학에 합격해야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냉정하게 흐르는 시간도 소중한 인생의 일부임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입맛을 잃은 릴리를 위해 망원 시장까지 가서 공수한 족발 접시를 밀어주며 마음속으로 나는 긴 편지를 썼다.

일러스트 _최연주


이제까지 살면서 언제나 변함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느닷없이 달라져서 무섭고 불안하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괴로울 거야. 그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아니? 너무 먼 미래를 내다보려 하지 말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거야.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그것이 공부가 됐건 운동이 됐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건. 뭐든 하루하루 짜증내지 않고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며 사는 것. 그것만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야.


어쩌면 일상이, 삶이, 미래가 우리가 원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란 생각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었는지 몰라. 코로나가 역대급 서프라이즈긴 했지만, 설사 원하는 대학에 순조롭게 들어갔다고 해도 시련과 실망 혹은 뜻밖의 일들은 언제고 일어나게 되어 있어.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종교처럼 열렬하게 믿고 의지하던 현실이 사실은 허상에 가까운 거야. 이번에 겪은 것처럼, 삶이란 언제 어느 때 어떤 계기로든 느닷없이 무릎이 푹 꺾이듯 무너질 수 있어.


그러니 지금 너는 공부 대신,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뭔가를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숨어들어서 쓰라리게 하지만 언젠간 찬란한 진주가 될 아픈 씨앗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오늘은 맛있는 족발을 만끽하자. 언젠가 ‘그때 참 힘들었지만 좋은 날도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 거야.


약속할게. 다시는 ‘파이팅’이란 말은 쉽게 하지 않을게. 파이팅을 외쳐가며 너의 전부를 바쳐야 할 일은 세상에 없어. 잊지 마,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너야.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박산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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