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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Nov 27. 2020

돈 앞에선 냉정하자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 7

“올 한 해만 참아.”

“알았어. 대신 올해 딱 일 년만이다.”


릴리가 이번 달 학원비라며 말해준 액수에 순간 내 표정이 일그러진 모양이었다. 그걸 본 릴리가 올해만 참으라며 나를 달랬고, 나는 올해만 참겠다고 대꾸했다. 작년에 비해 올해 일월부터 학원비가 정확히 두 배 넘게 올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들어야 할 과목들이 두 배 넘게 늘어나면서 학원비도 거기에 비례해서 늘어났다. 말로는 참겠다고 했지만 순간 눈이 캄캄하기도 했다.


사실 내가 불평할 입장은 아니었다. 릴리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학원비가 이미 오래전에 백만 원 단위를 넘었다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둘을 키우는 친구들(셋 키우는 재벌 친구는 없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렇게 구멍 난 가계부로 살고 있었다면서, 이제야 그 개미지옥에 들어왔냐고, 그동안 참 팔자 편하게 살았다고 놀려댄다. 그렇구나.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었구나.


친구들이 한 달에 얼마나 버는지 뻔히 아는데 그런 막대한 돈을 학원비로 쓰고 있었다니, 새삼 노고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신문 기사나 TV 뉴스에 나오는 교육비 평균은 대체로 27~28만 원 언저리라고 하던데. 대체 어떤 수치를 참고로 쓴 것이냐. 그런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분명 아이가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학원비를 뺀 학습지 비용만 넣었나?


어쨌거나 이제 나도 등골이 휘어지는 학부모 대열에 진입했다. 학원비를 대려고 필라테스 수업도 포기했다. 잘됐지, 어차피 비싼 돈 내고 고문받는 기분으로 매번 갔는데. 엄마는 배달시켜 마시던 우유까지 끊어가며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도 보내줬는데, 그깟 필라테스가 대수랴. 무엇보다 이렇게라도 학원비를 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마음은 굴뚝이어도 돈이 없어서 못 보내며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도 많다.

일러스트 _최연주


대체로 그동안 릴리와 나와 돈을 둘러싼 삼각관계는 지극히 건조하고 현실적으로 흘러왔다. 릴리는 어릴 때부터 용돈은 아빠에게 매주 일정 금액을(내가 봐도 조금 부족하다 싶게) 받아왔고, 외가 식구들을 만나면 듬뿍 받는 용돈으로 비상금을 챙겼다.


릴리는 돈이 떨어지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다. 한없이 귀찮은 설거지를 맡기고 몇천 원 쥐여주면 나야 편하니 서로에게 윈윈이다. 왜 설거지를 할 때마다 접시가 매번 깨지는지, 그 미스터리는 아직도 풀지 못했지만. 릴리가 집 안의 모든 접시를 깨먹는 날, 그동안 눈독 들이고 있던 코렐 접시 세트를 사겠다며 나도 남몰래 야심을 불태우는 중이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릴리가 몰래 전단지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잠깐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오겠다, 학생회 모임이 있다 등등의 다양한 이유(라 쓰고 거짓말이라 읽는다)를 철석같이 믿고 보내줬는데, 릴리 방에서 각종 전단지가 한두 장씩 발견되는 게 아닌가. 집에 오는 길에 받았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방탄소년단 콘서트 티켓을 사고 싶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과외든 전단지 알바든 뭐든 해보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남의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일찍부터 알면 좋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아이러니한 진실 중 하나는 평생 자기 손으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더 돈의 소중함을 모르고, 돈 없는 사람들을 하찮게 본다는 것이었다. 릴리를 그런 무례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비밀을 들킨 릴리는 거짓말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알바를 다녔고, 목표한 금액을 다 모으자 그만뒀다. 전단지 알바를 하면서 배운 게 있냐고 물어보자 처음에는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나중엔 요령을 익혀서 다 돌릴 수 있었다고 했다. 비결이 뭐냐며 궁금해하자, 먼저 활짝 웃으며 다가가서 구십 도 각도로 인사하고 전단지를 주면 대부분 받아준다고. 게다가 전단지 돌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후로 길거리에서 주는 전단지는 항상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받게 됐단다. 그런 말을 들으니 어쩐지 어른인 내가 부끄러워져서 그 후부터 어르신들이 돌리는 전단지는 다 받는다.


지독한 엄마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릴리와 나는 채무관계도 얄짤없다. 릴리는 아빠의 용돈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빈털터리가 되면 오천 원, 만 원씩 빌려간다. 나는 언제나 그 돈을 잊지 않고 받아냈다. 건망증이 치매 수준으로 심한 와중에 자식에게 받아야 할 몇천 원은 잊어버리지도 않고 악착같이 받아내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어 쓴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릴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꼬박꼬박 갚게 한다. 채무의 무서움, 사채의 무서움, 이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이제 부쩍 철이 든 릴리는 별다른 일거리가 없어 보이는 아빠가 양육비며 용돈을 어떻게 마련하는지 아냐고 나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난들 아나. 아빠가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하고 있는지. 아빠에게 물어봐도 대충 얼버무린다고 해서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했다. 아빠는 나름대로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테니. 너는 너대로 그 돈이 얼마나 힘들게 생긴 돈인지 알고 아껴 쓰면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알았다고는 하지만 요즘 중독된 마라탕을 사 먹는 횟수는 딱히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12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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