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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Nov 20. 2020

아빠를 꼭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5

“정말 아빠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느닷없이 릴리가 폭탄을 투척했다. 간만에 큰마음 먹고 네 토막에 만 원이나 하는 갈치를 사서 심혈을 기울여 구운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면서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꿈의 갈치가 아니라, 긴 뼈에 앙상하게 달라붙은 초라한 살을 바르느라 여념이 없던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깐, 우리가 릴리 아빠(그러니까 나의 전남편)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아무리 요즘 내 기억력이 금붕어의 그것과 동급이라고 하나(이렇게 쓰고 확인해보니 금붕어의 순간 기억력은 9초로, 8초인 인간보다 1초나 더 길다. 금붕어야, 미안) 그런 기억은 없는데. 아무리 폭탄 해체 전문가로 빙의해 갈치 살을 바르는 데 초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말이지.


알고 보니 릴리는 밥 먹다 느닷없이 아빠가 떠올라 한 말이라고 한다. 좀처럼 내게 협조하지 않는 갈치보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더 중요하니 일단 젓가락을 내려놓고 릴리를 봤다. 아이는 아빠와 언쟁을 벌였던 순간들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 좋아하는 갈치 앞에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좋을지 고민하다 먼저 물었다.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밥 먹다가 생각이 났어. 어렸을 때 엄마한테 막 소리 질렀던 기억도 나고. 나랑 말다툼하던 생각도 나고.”


이럴 땐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아빠를 골라서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며 사죄라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릴리가 머쓱할 것 같아 어쭙잖게 대꾸했다. “아빠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도 같이 소리 질렀잖아.”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미안하다, 엄마나 아빠나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어린 널 앞에 두고 만행을 저질렀어. 어른답지 못하게 둘 다 너무 자기감정에만 충실했군.’


릴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사실이지. 아무튼 아빠가 나한테 막 화내던 생각을 하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어.”


나도 안다. 릴리가 아빠를 못마땅해하는 이유를. 릴리 아버님은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밥은 밥솥이 해주는데 요즘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날 경악하게 했다. 요즘 트렌드는 당연히 모르고 관심도 없어서 십 대 딸의 외모나 패션이나 행동을 다 마음에 안 들어한다. 거기다 말이 뇌를 거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스타일이라, 부녀가 한번씩 만나 싸우기라도 하면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골치가 아플 때가 있었다.


릴리와 아빠는 심각한 말다툼을 몇 번 했고(사실 아빠가 일방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릴리는 입을 다물어버리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다정이나 친절과는 거리가 먼 그의 성격 때문에 아빠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 릴리 아빠는 우리 모녀가 영국에서 잠시 살다 돌아오자, 늦게나마 성실한 아빠가 되려고 나름 노력 중이다. 나로선 그 정도 변화라도 고맙지만 당사자인 아이는 또 생각이 달랐을 거고. 그동안 별말 없다 불쑥 아빠에 대한 마음을 꺼내 보여준 것이다. 난 한참 고심하다 말했다.


“아빠라고 꼭 사랑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도 아빠가 전보다 많이 나아진 건 알지? 아빠가 표현력은 꽝이지만 널 사랑하는 마음은 알잖아. 그러니까 아빠를 좀 봐줘.”


그러자 릴리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밥 생각도 시들해졌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살찌울 수 없는 갈치의 살을 대충 발라 릴리의 숟가락에 얹어줬다.


그런데 두 번째 폭탄이 날아왔다. “근데 왜 그런 아빠랑 결혼했어?” 


음, 언젠간 할 질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필 이런 타이밍에…. 순간 갈등했다. 어떤 버전을 들려줘야 하나. 팩트 버전? 미화된 버전? 넌 몰라도 돼, 버전? 마지막 버전은 우리의 옵션엔 없다. 릴리와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걸 서로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이니까(나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팩트 버전으로 갔다. “싱글로 살다가 이제 그만 결혼해야겠다 결심했고, 또 결혼할 수 있는 환경이 됐을 때 내 앞에 너희 아빠가 있었어. 그래서 한 거야.” 릴리는 순간 할 말이 없었던지 “와!”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알아, 그런데 현실에선 그런 결혼도 꽤 있어.”


릴리는 내 대답이 황당하면서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일러스트 _최연주


그런 릴리를 바라보며 나는 릴리 아빠를 비롯해 그동안 봤거나, 들었거나, 경험했던 다양한 아빠들을 생각했다.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우리 자매를 보러 오지도 않았고, 양육비도 주지 않았던 나의 아빠. 화가 나서 야단칠 때면 딸을 홀랑 벗겨서 집 밖으로 쫓아내고 대문을 잠가버렸다는 친구의 아빠. 오빠에게 말대답했다고 오빠와 합세해서 자기를 두들겨 팼다던 또 다른 친구의 아빠. 그런가 하면 자식들에게 과자를 사주려고 평생 피우던 담배를 단번에 끊어버렸다던 아빠도 있었고, 우리 딸은 커서 미스코리아가 될 거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아빠도 있었다. 새삼 놀라운 사실도 아니지만 세상에는 이렇게나 다종다양한 아빠가 있다.


그러니 아빠가 밉다, 아빠를 사랑할 수 없다는 릴리의 감정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인간이니 완벽할 수 없어 아이를 기르다 상처를 준다. 나도 그랬다. 내가 부모에게 상처받은 만큼 릴리에게도 그랬다. 물론 부모도 아이들에게 상처받을 때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부모가 먼저 인식하고, 인정하고, 사과해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좋겠지만 그 자체를 인지 못 하는 사람도 많고, 가족 간에 굳이 꼭 말로 사과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화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부모니까, 가족이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가질 필요 없고, 부모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친하고 가까워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사이면 베스트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죄책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릴리가 그 어떤 의무감이나 당위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자유 의지로 관계를 맺기 바란다. 세상에 당연한 관계는 없다. 나와 릴리는? 우리 관계는 괜찮겠지? 어떤 대답이 나올지 무서워서 아직 물어보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릴리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자면…. 결혼해야지, 마음먹었을 때 릴리 아빠가 내 앞에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결혼할 만큼 좋아하기도 했다. 다만 인간의 감정과 상황이 변할 때도 있고, 백년해로하지 못하는 사이도 있다. 언젠가 릴리가 더 크면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에 대해 나눌 날이 또 찾아오겠지.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2020년 12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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