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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Nov 19. 2020

쓰레기를 쓰자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4

마감을 앞두고 언제나 그렇듯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는데(미리미리 잘 하겠다는 다짐은 왜 이렇게도 지키기 어려운가 )릴리가 다가와 불쑥 말했다. “나 이제 십 년 다이어리 그만 쓸까 봐.” 문제의 십 년 다이어리는 몇 년 전 수학 과외를 끝냈을 때 작별을 아쉬워하는 선생님이 준 선물이었다.


그 선생님을 처음 소개받았을 즈음, 릴리는 원 없이 놀면서 폭주하던 사춘기 끝자락에 있었다. 저러다 릴리의 이번 생이 망하는 게 아닌가, 슬슬 걱정되던 차였다. 그러다 엄격하지만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지닌 분을 운 좋게 만나 그동안 던져놨던 수학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고, 자기 미래도 그려보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십 년이라는 길고도 묵직한 시간 프레임에 매혹되어 바빠서 며칠 몰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년 동안 꾸준하게 써왔던 일기였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고 하다니….


“왜? 그동안 잘 썼잖아.”

“지금까지는 밀려봤자 사나흘이었는데 이번에 시험이다, 학생회다, 일이 너무 많아서 한 달 반이나 밀려버렸어. 완전 실패야. 그러니까 그만 쓸래.”


실패의 역사라면 또 한 역사 하는 내가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려 이 년 가까이 썼는데 고작 한 달 반 밀렸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지 않아? 그건 말 그대로 십 년 다이어리니 한 달 반은 그냥 놔두고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길게 보면 십 년이란 시간에서 한 달 반은 아무것도 아니야. 살다 보면 완벽하게 하려다 결국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중요한 건 완벽하게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하는 거야, 끝까지 하는 거.


실패와 회한의 마스터인 나는 반백 년 정도 우려낸 사골 같은 충고를 했다. 그런 내 말이라면 무조건 잔소리로 치부하며 영혼 없이 눼에, 눼에, 대꾸하던 릴리가 놀라운 말을 했다.


“맞아. 진짜 그래. 내가 지금까지 그래서 그만둔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

“(미안해, 그거 유전이다.) 그래, 너 저번에도 다이어트 한다고 굶다가 하루 폭식했다고 쭉 먹었잖아.”

“엄마도 그러면서 뭘.”


릴리는 다시 환해진 표정으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내 이야기라면 어디서 개가 풀을 뜯나, 하는 표정으로 흘려듣던 릴리가 내 의견을 받아들여 마음을 바꾸다니! 그것도 저토록 긍정적으로!


솔직히 나야말로 잘하지 못해서, 완벽하지 못해서 팽개친 일들을 다 세려면 이박 삼일이 모자란다. 그중에서도 유독 뼈아픈 후회가 하나 있다. 내 인생 최초로 책을 내고 난 후, 한동안 책을 쓰자는 제안이 여럿 들어왔다. 놀랍고 기쁘고 황송한 마음에 뒷감당은 생각도 안 하고 덥석덥석 받아들였다. 그중 하나가 지금까지 번역 일을 하면서 채집하고 정리한 단어 노트들을 토대로 쓰는 에세이였다.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무책임한 마음이었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마치 거대한 사막을 앞에 둔 것처럼 막막해지고 말았다.

일러스트_ 최연주


답답한 마음에 자료를 좀 더 많이 모으면 도움이 될까 싶어, 어휘와 표현에 대한 책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사서 쟁였다. 서재도 모자라 안방과 거실까지 책들이 점령해가는데 글은 풀리지 않았고, 읽어야 할 자료만 산처럼 쌓이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반년을 몸부림치다 결국 항복했다. 그동안 쓴 원고들을 출판사에 보여주고 사정을 설명한 후 계약을 해지했다.


그 후로 한동안 글에 대한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겼다. 이러다 제대로 된 글은 영영 못 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 우연히 한 인터넷 서점에 실린 어떤 작가의 연재 글을 읽다 무릎을 쳤다. 그 작가도 마침 글쓰기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극복할 방법 하나를 알아냈다고 했다. 너무 잘 쓰려고 스스로를 달달 볶지 말고 그냥 쓰레기를 쓰자고 생각하기로 했단다. 그러자 큰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쓰레기를 쓰자”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광명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래,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거기다 내가 전업 작가도 아니고 번역가로 쓰는 글인데 왜 그리 잘 써야 한다고 안달했을까.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글도 아닌데 고뇌하지 말고 평소 쓰던 대로 쓰레기를 쓰고 나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면 될 것을. 일본 근대 문학에서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것은 『설국』의 첫 문장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고 한다. 노벨상을 받은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려 십삼 년 동안 그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완벽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는데, 감히 내가 뭐라고.


잘하지 못해도 좋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뭔가를 시작해서 끝내는 습관을 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늦게 깨달았다 .


못해도 좋으니 일단 끝까지 하고, 마음에 안 들면 고치고 또 고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잘할 날도 오겠지. 언젠가는 펜을 내려놓고 흡족할 때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저 다행이다.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2020년 12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바로가기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661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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