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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Nov 12. 2020

엄마가“예스”라고 말해주면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 2

십 년 전 릴리를 데리고 떠났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냥 귀국하기 아쉬운 마음에 파리와 로마, 이스탄불을 여행했다. 파리와 로마를 거쳐 이스탄불의 호텔 방에 트렁크를 내려놓았을 때 맥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정말 여기에 왔구나’ 싶었다. 


눈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릴리가 갓난아기 때 한동안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릴리를 봐주셨다. 내가 ‘마지막’이라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통역대학원 시험에 한 번 더 도전할 때였다 . 엄마는 갓난아기를 업고 공부하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워,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오셨다. 


엄마와 함께 살던 그 어느 날 햇볕에 바삭바삭하게 마른 천 기저귀와 내복 같은 옷가지들을 걷어서 안방으로 갖고 왔더니,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세계여행 프로그램의 터키 편이었다. 지금 봐도 비현실적인 새파란 바다, 모스크의 하얗고 동그란 지붕들, 이스탄불 거리를 우아하게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고양이들이 나오는 장면을 같이 보다가 무심코 나도 가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엄마가 텔레비전에서 얼굴을 돌려 잠시 내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종이 기저귀조차 마음 편히 사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쪼들려서 엄마가 시장에서 끊어 온 천으로 기저귀를 만들어 쓰던 때였다. 우리 형편에 유럽 여행이란 터무니없는 사치이자 허세였다. 무엇보다 갓난아기인 릴리를 데리고 어딜 간단 말인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얼굴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갈 수 있다. 가겠다고 생각하면 언젠가는 가게 돼 있어.” 


그러고 나서 엄마의 그 말도, 터키도 잊어버렸다. 언젠가 꼭 가고야 말겠다고 버킷리스트에 적어놓을 만큼 간절히 좋아하는 곳도 아니었으니. 그런데 알 수 없는 운명은 마흔 무렵 나를 영국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그것도 릴리와 함께. 그리고 영국에서 귀국하기 전 가보고 싶은 나라들을 고르다 오래전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가겠다고 생각하면 언젠가는 가게 돼 있어.’ 


운명처럼 이끌린 터키에서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이스탄불 거리를 릴리와 함께 걸었다.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세계 삼대 스타벅스 중 하나로 꼽히는, 바다 바로 앞 이스탄불 스타벅스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는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의 마음을 생각했다. 도무지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인생에 갇힌 듯한 딸의 울적한 얼굴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도 엄마는 아들처럼 믿고 의지한 딸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힘내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전했을 것이다. 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는 인생을 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엄마의 보이지 않는 격려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하니 다시 뭉클해졌다.  

파리에서 잠깐 지냈던 작업실 풍경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이제는 내가 릴리에게 그런 마음을 보여줄 차례가 돌아왔다. 몇 해 전 릴리가 한국 입시를 포기하고 일본 유학 준비를 시작했을 때였다. 어느 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릴리 친구 A의 엄마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이는 날 보고 인사를 하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릴리가 일본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면서요? 릴리 엄마는 참 대단하세요.” 


내가 미처 대꾸도 못 한 사이에 그녀는 평소처럼 속사포를 쏘듯 말했다. “릴리 하나 키우시면서 그렇게 먼 외국까지 보낼 생각을 다 하시고. 난 아이가 셋이어도 A는 아무 데도 못 보내겠던데. 거기다 또 일본은 주택 사정이 엄청 열악하다면서요. 집세도 비싼 데 방은 콧구멍만 한 곳에 어떻게 딸을 보내요?” 


연타로 날아오는 질문에 멍해진 나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억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녀가 딸인A 를 스토킹하듯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문자를 보낸다는 이야기도. 


할 말을 다 하고 후련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A의 엄마에게 더듬더듬 대꾸했다. “릴리가 가고 싶어 해서요.” 그녀는 알 듯 모를 듯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잘됐으면 좋겠다”는 영혼 없는 멘트를 날리고 갔다. 그녀의 등에 대고 나는 무음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절대로 딸을 그런 곳에, 먼 곳에, 외국에 보낼 수 없겠죠.’ 


너무 사랑해서, 믿지 못해서, 혹은 걱정된 나머지 멀리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길까 항상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자식이니까. 허나 마음껏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수 있게 둥지를 열어주는 것 역시 사랑하는 이들의 몫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오래전에 엄마에게 배웠다. 보내는 마음이 이토록 쓰라릴 줄은 미처 몰랐지만….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2020년 12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바로가기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661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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