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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Nov 17. 2020

언제나 기대는 배반당하지만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_에피소드3

마흔 중반이 넘어 조금씩 재테크와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 돈을 불리겠다는 욕심을(그럴 돈도 없지만) 떠나서,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더 일찍 시작했어야 했는데. 쉰을 코앞에 두고 시작하려니 좀 많이 늦었다는 생각에 후회도 되고 민망하기도 하다. 


변명하자면 평생 수입이 들쭉날쭉한 프리랜서로 살다 보니 경제적으로 뭔가를 계획해서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수입이 생기면 먼저 나에게 지불하고(그러니까 저금과 투자를 하고) 그 후에 집세, 공과금, 식비, 학원비 같은 생활비를 써야 한다는 재테크의 황금률도, 그 수입이란 것이 코딱지만 한 상황에선 정말 의미가 없다. 나 혼자 산다면 허리띠를 졸라매든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내가 한쪽에서 졸라맨다 해도 학원비를 비롯해 릴리에게 들어가는 돈이 생기면서 다른 한쪽이 스르르 풀려버리니, 이 역시 의미 없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교육방송 다큐멘터리로 기초를 훑고 『부자들의 경제 기사 읽는 법』 같은 책을 참고서로 사서 열심히 줄을 치며 일 년 넘게 경제 신문과 같이 읽기 시작했다. 가끔 십만 원, 이십만 원 정도 여윳돈이 생기면 주식에 투자도 해보았다(아직까지 내 계좌는 마이너스다). 

일러스트 _최연주

평생 접한 번역이나 문학이나 책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책들을 읽어보며 놀라웠던 점은 투자 세계가 인생과 무척 닮아 있으며(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투자에 대한 명언이나 격언은 인생으로 바꿔놓고 봐도 무척 잘 통하고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명언은 바로 “주식은 예측하는 것 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원전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주식 대신 투자나 미래를 넣은 말도 많이 눈에 띄었는데 기본 의미는 다 같다고 생각한다. 요지는 ‘예측하려 하지 말고 대응할 것’.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말만큼은 절실하게 실감했으리라. 주가가 곤두박질치던 그때 나 역시 처절하게 느꼈다. 


우리 집에서 그런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사람은 어차피 평소에도 집에서 일하는 나보다는 기나긴 겨울방학에 이어 개학도 못 하고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듣게 된 릴리였다.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는 릴리로서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훨씬 더 마음 편하고 넉넉하게 시간을 쓸 수 있기도 했다. 


그런 릴리에게도 코로나 직격탄이 터졌다. 6월과 11월에 각각 한 번씩, 총 2회 유학 대비 시험 중 더 나은 성적으로 지원이 가능했던 시스템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6월 시험이 전 세계적으로 취소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는 통보를 받고, 릴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가고 싶은 대학을 정해놓고 6월 시험을 목표로 전력 질주했는데, 눈앞에 있던 목표가 느닷없이 저만치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 목표 앞에서 살짝이라도 넘어지거나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평소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면 그대로 불합격이 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이 되자 릴리는 분노하고 억울해했다. 


나는 서투르게 위로하려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어 달라’는 일침을 받고 뜨끔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 릴리는 내 한마디에 발끈하다가 급기야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그런 릴리의 마음을 알고 절절히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릴리 혼자만 당하는 일도 아니니. 릴리에게 하루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11월 시험 준비를 시작하라고 했지만 내 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릴리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주도면밀하고 철저하게 세워놓은 계획이 어그러져서 속상한 심정은 알겠어. 두 번 볼 수 있는 시험을 한 번에 끝내야 하니 무섭고 두려운 마음도 알아(우리에게 재수는 없다고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기 마련이야. 넌 처음이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공들여 세운 계획이 틀어진 사람은 어마 어마하게 많아. 당장 엄마만 해도 가려던 취재 여행도 못 가게 됐잖아. 중요한 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거야.” 


릴리는 다독이는 내 품 안에서 실컷 울고 난 뒤에 진정했다. 나는 혹시라도 시험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했을 때 시도할 수 있는 플랜 B와 C를 제안했다. 릴리가 입을 열어 반박하려고 하자 일단 들어보라고 설득했다. 


“어떤 상황이든 어긋날 수 있어. 그럴 때 대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확연히 달라. 세상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네 계산대로 흘러가는 상황은 그리 흔하지 않아. 그러니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때 저렇게 하자고 생각해두면 당황하지 않을 수 있어. 무엇보다 당황해서 허둥대는 바람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거야. 매사 계획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는 여지를 둬야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고.” 


다행히 릴리는 입을 꾹 다물고 들어주었다.   

릴리는 울음을 멈추고 퉁퉁 부은 얼굴을 씻으러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든 혼자 알아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싶어 하다 보니 그만큼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때 더 심하게 상처받는다. 앞으로 여러 번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세상에, 운명에 분노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겠는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그걸 배우는 게 인생이었다. 그래도 내가 여러 번 넘어져봐서 아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지도 않았어. 이 말은 굳이 안 해도 되겠지?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2020년 12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바로가기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661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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