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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May 30. 2021

적합한 휴식과 취미 생활

토요일의 비는 때로 반갑다

매일 하는 일과 중 하나는 몸만 쏙 빠져나오는 남편과 딸의 긴 꼬리를 자르러 다니는 것. 침구 정리를 하고 책상도 치워줬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빵을 소분해 냉동실에 넣고 브로콜리를 삶아 두고 오징어젓갈에 마늘이랑 깨소금을 추가한 뒤 버무려 냉장실에 넣어놨다. 그걸 왜 지금 해? 남편이 물었다. 당신이 할 거 아니면 잔말 마셔.


혼자 있을 때는 최대한 나만의 것으로만 채워져야 한다.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 글을 쓰거나 쓸 것을 구상하거나, 무언가를 읽는 행위. 그러니까 집안일은 남편이나 아이가 같이 있을 때 하는 편이 유리하다.


해야지, 해야 하는데, 하고 늘 미뤄뒀던 비즈 귀걸이를 만들었다. 마침 목이 아프지 않아 시험 삼아 여러 버전으로 샘플링. 맞은편에 앉은 은율은 8인용 테이블에서 거의 6인가량의 지분을 확보한 채로, 갖가지 먹을 것들을 클레이로 만들었다. 그중에 특히 사과랑 애플파이는 파는 모형품 같아 놀랐다. 얘는 진짜 왜 이리 잘할까. 부럽다.


새우 때려 넣고 볶아 볶아준 남편의 볶음밥은 따봉. 내가 안 해도 되는 남의 요리는 다아 맛있다. 쌍엄지를 몇 번이나 치켜세우는 이유는 물론 맛있어서도 있지만, 또 얻어먹으려는 속셈도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칭찬에 신난 자뻑 남편이 한껏 들떠 말했다. 랄랄라 랄라, 난 역시 요리도 잘해.


오후에는 편이 갈려 영화를 보았다. 남편은 혼자, 나는 은율과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를. 뻥 안치고 스무 번은 넘게 본 영화인데도 똑같은 부분에서 무섭다며 눈 감고 귀 막는 딸이라 같이 있어줘야 했다. 하지만 엄마님은 잠이 들었고요, 얼마나 잔 지 몰라도 눈을 떴을 때 은율이는 책상에서 또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고, 소파에는 세상 태평한 자세로 남편이 자고 있었다. 그렇게 지가 보고 싶은 거 고르더니 와아.


비는 늦은 오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종일 온다. 오늘은 아무 데도 못 갔네, 남편이 티브이를 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 난 좋아, 자세는 같고 방향만 달리 누워 있는 은율이 이어 말했다. 둘 사이에서 적당껏 중재의 역할을 해야 하는 나로서 오늘은 은율이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배가 꺼지지 않아 좀 늦게 시작한 저녁 식사였지만 급할 건 없었다. 토요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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