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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Jun 01. 2021

엄마는 여우가 될게

너는 <어린 공주> 해

내 생활은 무척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고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나는 늘 지루해. 허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많이 달라질 거야. 그러면 수많은 발소리 중에 네 발소리를 구별하게 될 거야. 다른 소리는 나를 땅속 깊이 숨게 하지만, 네 발소리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좋아하지 않아. 밀은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거든. 그래서 밀밭을 바라봐도 나는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어. 그건 슬픈 일이지. 하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밀밭은 내게 아주 근사한 광경으로 보일 거야. 밀밭이 황금물결을 이룰 때 네가 기억날 테니까. 그러면 나는 밀밭을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마저도 사랑하게 될 거야.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다.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지.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너는 너의 장미에 책임을 져야 해,라고.


너 다섯 살 때까지는 엄마가 진짜 화 한번 안 낸 거 알아? 뻐기듯 던져 놓고 나는 바랐다. 우와 엄마 진짜? 같은 리액션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 띠용용용용- 그건 화가 아니라 매우 적절한 대응이야,라고 생각하지만 애가 받아들일 리는 없지.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이 되니까 화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 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대뜸 그런다. 나도 스트레스 참을 때 많은데. 그래 그렇겠지, 너도 사람 새낀데.


엄마한테 스트레스받으면 참는 거야? 응. 다시 물었다. 너랑 나랑 서로 엄청 좋아하는데 왜 스트레스가 생길까? 그녀가 답했다.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래 맞아. 아무리 친해도 계속 붙어 있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생겨. 이 말을 끝으로 화제는 다른 것으로 옮겨 갔지만 딸의 말이 머릿속을 돌고 돌았다. 아이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그 때문 같았다.






등교하는 문 앞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두세 번씩 하는 아이는 엄마 품이 너무 좋아,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빨리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면서도 나를 좋아해 줘서 한편 기쁘다. 네가 알려나 몰라도 나는 네가 늘 궁금하다. 뭘 배웠는지, 친구와 다투진 않았는지, 뿌듯한 순간은 없었는지. 나는 딸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자야 할 시간에는 친구에게 느낀 서운한 감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되뇌더니 이내 울먹울먹 고해성사 시이작.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 역할이 아직은 유효한가 보다. 일과를 조정해서 친구와 부딪히는 시간이 줄게끔 조언했다. 변덕쟁이라 해도 마음 헤아리기가 처방 같아서.


고해성사가 무색하게 딸은 다시 희희닥거렸다. 구구단 외우면서 뭐 그리 웃을 일이 있는지 궁금할 남편이, 벌써 열 시가 넘었는데 안 자냐면서 참견을 했다. 냅둬 우리 맘이야 메롱! 딸과 나는 합심하여 침입자를 물리쳤다. 우리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가장 좋은 순간은 잠들기 전 라잇나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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