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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30. 2022

이미 사랑하는 우리의 아이

친구의 임신 소식이 비출산주의자의 마음을 뒤흔들다

            “요즘 생리통은 어때? 좀 나아?”

            “나 이제 생리 안 해...임신했거든.”


1.5초 간의 공백 후에 나는 레나에게 활짝 웃어보인다. 그리고 우리 집 부엌 스툴에 앉아있는 레나에게 몸을 굽혀 어깨를 꼭 안고 뺨에 힘차게 뽀뽀를 해줬다. 임신을 원했던 친한 친구에게 그만하면 마땅한 축하를 해 준 셈이지만, 속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올 것이 왔다.’ ‘얘도 이제 그 쪽으로 가버리는 건가.’


내 말은 그러니까 32리터 배낭 하나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고 애인과 싸우고 가출해서 불쑥 찾아가도 되는, 자유로운 싱글 친구 말이다.

비출산을 자꾸 다짐하는 나 같은 30대 여자에게 주변 친구들의 임신 소식은 두려움을 일으킨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아이를 갖게 되면 세상보는 눈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온 몸으로 그 일을 겪는 여자들에겐. 우리는 처음에는 자주 만나려고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운신이 자유로운 내가 모든 걸 레나와 아이의 편의에 맞춰야할 것이고 레나의 세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적어도 첫 몇 년은 하는 얘기마다 아이에 대한 것일 테다.

그녀에겐 또래의 다른 아이 엄마들이 더 매력적이고 쓸모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유모차를 끌며 산책을 다니고 아이 물건들을 교환하며 놀이터에서 매일 만나 수다를 떨 것이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자 나는 금방 울 것 같은 심정이 된다.


 내 머릿 속에 있는 ‘아이 엄마들의 세계’는 물론 아직 엄마가 되어보지 못했거나 영영 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엄마 이미지’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거라고, 나는 그런 의심도 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거기 속아서 지레 선 긋고 단념하지 말자고. 실제 엄마됨은 훨씬 복잡미묘하고 일상의 변화도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


그런데도 짧은 순간 내 안에서 뭐랄까, 낭패감과 배신감이 똘똘 뭉치는게 느껴진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고도, 결혼에 ‘안착’하지 않고도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걸 몸소 보이고 싶고, 내 친구들이 이 과정에 함께하길 바랐으니까.  


레나와 나는 환경 대학원에서 만났다.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을 지닌   레나는 내가 무심코 건넨 말들도 다 기억해준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옆나라 독일에 와서 유학하는 그녀와 달리 아주 멀리서 온 내가 들려주는 성장 과정이나 가족 이야기는 분명 낯설텐데도 레나는 늘 더 알고 싶어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많은 동기들이 이 도시를 떠났지만 우리 둘만은 여기를 제 2의 고향 삼아 계속 살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페미니스트이고 생태주의자라는 공통점이 있고, 오래 열심히 일하지만 벌이가 적은 풀뿌리 커뮤니티 활동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녀는 말하자면 나의 독일 베프이다.


자, 그러니 어서 결단을 내리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속수무책으로 상황이 바뀌어버릴 지 모른다. ‘나의 친구 레나를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답은 간단하다.


가까이서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

한 몸이 둘이 되어 힘드니까 도와주는 것.

그녀의 출산과 육아가 내 삶에도 어떤 변곡점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

그 아이가 앞으로 우리와 늘 함께할 것임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뭐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나?

레나가 ‘이번에는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기다렸다’며 변명하고 지난 두어 달 간의 ‘입덧 모험담’을 들려주는 동안, 나는 레나에게 먹일 채식 만두를 빚으며 마음을 반듯하게 정리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언젠가 일어날 일이였고 나도 내내 알고 있었다. 갈수록 '이번 생엔 비출산'으로 굳어져 가는 나와 달리, 레나는 한결같이 아이를 셋이나 낳고 싶다고 했는데, ‘괜찮은 남자’를 만나 몇 년 동거하면서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었나 보다.


그녀의 욕망을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했다. 화목하고 안정된 가족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인 짤쯔부르크 지역에서 왔는데, 가족 친지들이 여전히 옹기종기 근처에 살아서 매년 크리스마스엔 다 같이 스키를 타고 숲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부모님이 레나 몫으로 나온 양육 지원금을 24년 동안 꼬박꼬박 통장에 넣어주었다. ‘가족’이나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빨래 삶는 냄비처럼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 얼른 불을 꺼버려야 하는 나와 다르다.

레나는 ‘경력녀' '맘충' '노키즈존' 같은 단어에 움찔하게 되는 한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알파걸 파워’로 뚫어야 했던 대입과 취업난, 그러면서 체화된 ‘출세 지향’과 ‘성취 중독’을 거쳐 결국엔 ‘탈조선’을 감행한 나와는 다르다.  레나에게 출산은 설레는 도전이고 자랑스러운 발전에 가깝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이 모든 차이가 아니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왔으며, 내가 그 사랑을 지키고 가꾸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고 또 묻기 시작한다. 레나의 계획에 대해서.

        

            레나: “담당 조산사는 니콜이라고, 두 번 만나봤는데 너무 좋으셔. 되게 멋있는 여자라서 너한테도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야. 산부인과 진료는 10분이면 끝나는데 니콜이랑은 한 두 시간씩 차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 자기 할머니 때는 어땠고, 그동안 분만한 사람들한테는 어떤 일이 있었고, 하는 이야기들. 니콜 만나고 나면 마음이 엄청 편해져.”


레나는 요약해 말하자면 ‘검소한 환경주의자’이다. 10년 넘게 채식을 했고, 자전거와 기차만 타고 다니고 중고 물건을 고집한다. 잔디밭에 풀 하나도 함부로 한 뽑는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렇게 해낼 모양이다. 집에서 출산하려고 일찌감치 조산사를 만나고 변함없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아기 용품은 주변을 수소문해 다 물려받기로 한다. 심지어 아기를 기저귀 없이 키우는 방법도 공부하는 중.         

        

            나: “계획하는 것 마다 정말 너답다. 그런데 너네 집에서 분만하기엔 좀 위험하지 않아? 계단이 가파르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인데. 혹시 위급하게 병원에 가야된다고 해봐...짤쯔부르크 엄마 집에서 낳는 건 어때?”


내 안에선 임산부에 대한 ‘학습된 보호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레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걱정거리가 된다. 175센티미터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녀인데도, 물건을 들어올리는 것, 입덧에도 내가 빚어준 채식 만두를 잘 집어먹는 모습 (임산부가 채식을 해도 되나) 차도에서 쌩쌩 달리는 차들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슬리퍼 바람으로 다니는 것도 (신발이 부실하면 허리 아플텐데) 가 걱정된다.


자, 진정하고 또 결정을 하자. 내 역할은 이렇게 문명의 편리와 레나의 안전을 고려한 ‘절충안’을 내놓는 것.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내 안에 고정관념과 롤모델 없음 때문에 선을 넘고 싶지 않다.

 

레나는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스스로의 안전과 안녕을 책임지는 멋진 임산부이다. 신 전보다 불편하긴 하지만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전과 다름없이 자기 원칙을 고수한다. 이를테면 아침 의식인 카푸치노 한 잔은 잠시 포기했어도 여전히 대부분 채식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레나는 그런 사람이고, 난 그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 된다. 내게 도움을 청할 때 기꺼이 달려가면 된다.


우리의 기획회의와 토론은 이윽고 공동양육(Co-parenting)으로까지 이어진다. 생물학적 부모나 부부가 아닌 사람들끼리 합의에 따라 아이의 돌봄과 교육의 책임을 나눠지는 관계. 아직 우리 둘 다 잘은 모르고 ‘콘셉트가 멋지다’ 하는 정도지만 레나가 진지하게 눈을 빛내자, 내 마음도 같이 설렌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공포, 동경,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아름다움과 완전함, 새로움과 위대함을 본다. 눈을 빛내며 아랫배를 쓰다듬는 레나의 모습에서.

사랑은 사람을 어디까지 바꾸는가.


주말에 있을 레나의 31살 생일 파티를 앞두고 선물을 준비했다. 미역 한 단과 말린 표고버섯 열 개, 그리고 사진을 넣어 만든 버섯 미역국 레시피 카드. 실제론 내가 국을 끓여다 주겠지만,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미리 알려줘야 나중에 수월하게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10월에 한국 가. 예정일이 언제랬지?”

            “12월 초야. 그 전에 돌아오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여기 꼭 있어야지.”


올해 첫눈이 올 때 즈음,

나는 내가 이미 사랑하는 우리의 아이,

부찌(Butzi)를 처음 만난다.

레나는 작년 12월 중순, 자기 집에서 무사히 아기를 낳았다. 태반이 제때 나오지 않는 위기가 있었고,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연결되는 기분이었고, 조산사와 사랑에 빠져버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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