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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30. 2022

단 하나뿐인 간호 모임

친구의 이른 죽음 앞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다

        “집에 대여섯살 아이만한 인형이 몇 개씩이나 있어. 그리고 인형들한테 말을 시키더라니까. 바닥에서는 토끼 세 마리가 뛰어다니고...”


한 친구가 비프카의 집에 다녀와서 이렇게 전했다. 나도 곧 그녀를 직접 만났는데, 정말 특이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쁜 의미에서는 아니고 마흔 둘에도 천진난만하다는 것, 철 들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눈가에 주름이 잡힌 그녀의 얼굴을 보면 분명 40대가 맞는데, 같이 얘기하다보면 같이 얘기하다보면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우울과 시름이 도망갔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동심의 세계에서 살 줄 알았던 비프카는 죽음의 세계에서 초대장을 받고 말았다. 너무 빨리, 너무 갑자기. 유방암 4기라고 했다.


한동안 동네에서 안 보이던 비프카를 모임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마술 상자라도 보여줄 것처럼 나를 한 쪽 구석으로 불렀다. 한 손으로 옷자락을 들어 올리며 “수술한 데 보여줄까? 완전 못생겼어”라고 속삭였다. 여전히 밝았다.

그렇게 한 차례 ‘모험’으로 끝났어야 하는데, 예후가 좋지 않아 암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하지만 항암 치료는 완강하게 거부. 하지만 방사선 치료는 비프카에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괴물이었다. 컴컴한 숲속의 트롤이나 과자의 집 할망구처럼. 치료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카카오 관장’이나 ‘염소계 드링크’ 같은 민간 요법에만 열심이었다. 평생 안 쓰고 모아놓은 고집이 그 때 발현됐는지, 누군가 항암에 ‘항’자만 꺼내도 바로 토라졌다.


    “그래도 그게 걔 선택이야. 존중해야지”


삼삼오오 모이면 두런두런 걱정하는 말들을 하다가도 이 한마디가 마법같이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애가 탔다. 한국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인데!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면 남의 일에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나서는 한국 정서에 비해 독일의 개인주의는 개인을 때론 너무 존중해버리는 것 같았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비프카의 상태가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뇌종양 때문에 눈 앞이 흐려지고 인지 능력도 오락가락...

친한 친구들 열댓명이 왓츠앱 채팅방에 모였다. 심심하게 누워 지내는 비프카가 언제든 우리와 수다를 떨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교대로 간호하는 스케줄을 상의하기도 했다. 비프카는 거기에서 알고리즘이 보여준 아기 코뿔소 영상을 올리거나 연을 끊은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털어놨다. 예쁜 꽃 사진 같은 것들도 두서없이 날아왔다. 우리 친구들은 거기 성실하게 호응했다. 어느 볕 좋은 날은 충동적으로 그녀 집 앞 잔디밭에 모이기도 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슬픔 금지. 눈물 금지. 평소와 다름없이 하하호호. 

꼭 어디 좋은데 가듯이 호쾌하게 배웅하고 배웅받기. 그게 비프카가 바란 친구들의 지지였다.


다들 거기 잘 맞추는 듯 했는데, 나는 초반에 적응이 어려웠다. ‘시한부인데 가족 중에 누가 안 오나?’ ‘전문 간병인이 아니라 친구들한테 의지한다고?’ 등등...마음속에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여름,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질 동안 나도 곧 동의하고 참여하게 됐다.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방식이 당사자의 바람에 따라 정해지는 것.

그 다름을 요청하고 인정하고 실행하는 것.

혈연 가족을 대신해 자발적으로 간호하는 모임.

이 낯선 장면들에 말이다.


그녀의 가족들 - 언니와 아버지, 사촌들은 임종 2주 전쯤에야 나타났고, 법적 제도적 권한을 써서 비프카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안 좋다며 면담 시간을 극히 제한했고, 가족들은 아직 비프카가 살아있는데 재산을 두고 왈가왈부했다.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이었지만 '가족'이란 자격증은 그 무엇보다 강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비프카는 곧 떠났다.

숨을 멈춘 그녀는 미리 골라두었던 드레스를 입고 관에 누웠다...고 한다. 가족은 염을 한 고인을 만나는 절차를 3일간 진행한다고 알려왔지만,  더운 여름이라 시신이 빨리 변형되어서 그녀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나 역시 연노란 공주 드레스를 입고 고이 누워있는 비프카를 채팅방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그 다음 주, 유품 정리에 초대받아 비프카의 집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들어서자 마자 그녀 냄새가 확 덮쳐왔다. 밝은 파스텔 톤에 꽃을 모티프로 한 아크릴화들이 방마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프카가 직접 그린 것들 같았다.

북쪽 도시에서 온 언니 가족들이 현장 지휘를 맡았는지, 무엇은 가져가도 되고 안되는지 일러주었다. 여자아이 인형들이나 기타 같이 값이 좀 나가는 것들은 가족들이 선점해 구석에 한데 모아두어둔 모양이었다.  

간호 공동체 친구들에게 허락된 건 옷가지 뿐. 불룩 쌓인 무더기에서 그녀의 옷을 하나씩 꺼내 거울 앞에서 내 몸에 대어 보았다. 비프카가 입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겹쳐지는 옷들도 있었다. 이 상황이 애잔하고 아련해서 꿈인가 싶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꽤 멀쩡해보였다. 거기서 나와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상대는 빼빼 마른 오스트렌리안 세퍼드 ‘에이미’ 뿐이었다. 나는 어수선한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부르면 달려오는 에이미의 목덜미만 자꾸 쓰다듬었다.


두 계절만에 지나가버린 비프카의 투병과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이렇게 믿게 되었다.

죽는 과정, 죽음을 기리는 방식, 죽음 이후의 행정 처리에 더 많은 선택지가 필요하다고. 각자가 선택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마지막에 일어난 일들, 혈연 가족들이 ‘남들 다 하는 데로’ 벌인 평범한 일들이 평범치 않은 비프카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 같지 않다.


        “결혼 안하면 젊은 시절엔 잠깐 자유로울지 몰라도 결국 독거노인으로 외롭게 늙어 죽는거야.”


내가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엄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을 되풀이해왔지만 나는 사실 믿은 적 없다. 실증 자료가 부족해서 정면 반박을 잘 못했을 뿐...달라도 외롭지 않은 죽음을 어렴풋이 상상해왔다. 비프카를 보내면서는 상상 속에 모습을 정말로 목격한 기분이다. 관혼상제와 생로병사를 함께 겪는 또 다른 가족을 살아 본 것 같다.


이 ‘다른 가족’은 완벽하진 않았다. 어떤 면에서 우린 서툴기 짝이 없었다. 속한 종교가 없었던 비프카는 자신을 화장해서 프랑스 해안가 어디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격식있는 장례식은 아예 열리지 않았고, 가난한 우리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동네 커뮤니티 센터 마당을 빌려 조그만 '애도 축제'를  열었다. 비프카의 가족들은 지갑을 열지 않았다.


급히 준비한 '축제'는 우왕좌왕 했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가족이란게 원래 그렇지 뭐. 이것도 비프카라면 즐겨주지 않았을까. 육개장도 검은 옷도 상주도 없었다.

그렇다고 뚜껑 열린 관이나 오르간 연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을 기리는 하나뿐인 의식이었다.  


40대에도 맑은 눈과 밝은 웃음으로 주변을 밝혔던 친구 비프카. 너무 일찍 떠났다.  

요즘 밤에 회색 천을 덮고 잔다. 한 쪽 면이 늘 서늘한 ‘냉장고 이불’인데, 비프카네 집에서 얻어온 유품 중에 하나이다. 그녀의 냄새가 난다. 일부러 빨지 않았다. 냄새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난다.

옷걸이 맨 앞에는 비프카의 드레스가 걸려있고, 작업실 한쪽에선 그녀가 늠름하게 잘 키운 몬스테라가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린다.


이것은 내가 그녀를 기억하기로 한 방식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의 죽음을 단 하나뿐인 방식으로

애도하고 기억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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