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재의 등장과 타파
우리의 비행은 아주 짧았다. 형은 도착시간이 예상보다 빨라서 일정이 여유로울 것 같다고 말했다. 흐리고 추운 한국에서 두 시간 만에 해가 쨍쨍한 나라에 왔다니.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도쿄에 도착했던 그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사실은 망상에 가까운, 이곳이 마치 아예 다른 세계 혹은 우주 같다는 생각. 너와 내가 다른 우주에 도착했어. 우린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까. 행복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린 건 다른 악재였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할까 고민하다 문득 악재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건 악재였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이 나오는 곳으로 갔지만 20분이 지나도록 내 캐리어는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짐의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레일은 멈춰버렸고 그때까지도 내 캐리어는 없었다. 레일에 남은 캐리어들을 한데 모으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내 수화물 태그를 내밀었다. "코레 아리마스까?" 짧은 일본어와 영어, 바디랭귀지를 섞어서 표현했더니 대충 알아들은 듯했다. 그녀는 내 수화물태그를 받아 들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사실 정확히는 모르나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불안, 짜증, 허무, 미안함이 마구 뒤섞였다. 내 캐리어가 비행기에 실리긴 한 걸까, 혹여 문제가 생겨서 따로 분리됐던 캐리어가 착오로 그 사실이 나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로 이륙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동시에 그 감정들을 옆에 있는 짝꿍에게 내비치고 싶지 않아서 한껏 억누르느라 답답한 마음도 있었다. 그때 형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한 게 전부 형인데 그 일정이 틀어지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그도 그걸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20분쯤 지나서 나타난 직원은 빈손이었다. 고백하자면 제발 돌아오는 직원의 손에 내 캐리어가 들려있길, 레일 어딘가에 끼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설명하길 바랬었는데. 그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여기부턴 난 알아듣지 못했다. 일본어를 잘하는 짝꿍과 직원의 대화다. 대충 설명하자면 컴퓨터로 확인했더니 분명 도쿄에 도착한 내 캐리어가 레일에 남아있던 다른 승객의 캐리어와 바뀐 것 같고 그 승객과는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닿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혼돈의 카오스였다. 이미 우리는 입국장 밖도 못 나가보고 한 시간을 날려버렸고, 짐이 없이 일단 나가거나 언제 연락이 될 지도 알 수 없는 승객을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국 우리는 내 캐리어 없이 입국장에서 나왔다. 앞의 과정들을 겪으며 우리는 이미 두 시간가량 시간을 날린 뒤였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승객과 연락이 닿으면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입국장을 빠져나왔을 땐 우리가 시부야에 도착할 걸로 예상했던 시간이었다.
한껏 신나야 할 시부야로 가는 전철에서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로 티는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머릿속엔 각자의 불안으로 가득했으니까. 불안의 잠식속도가 아주 빠른 편인 내 머릿속엔 만약 다음 날까지 연락이 없다면, 서울로 가는 날까지 짐을 찾지 못하면이라는 망상이 차올랐다. 옷이야 같은 걸 입는다고 해도 캐리어에 있는 트리트먼트가 없으면 내 탈색모는 어쩌지, 충전기도 전부 캐리어에 있는데, 사진 찍을 필름도 캐리어에 챙겼는데. 캐리어에 챙겨 온 온갖 것들이 떠오르며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회개한 곳은 호텔로비였다. 체크인을 해놓고 입실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로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이미 여러 번 해서 익숙한 일본번호, 대한항공 하네다지점이었다. 또 익숙한 어눌한 한국어. "승객과 연락이 되셨어요. 번호 알려드릴 테니 연락해 보세요." 직원이 알려준 번호는 한국번호였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그 번호를 카톡에 추가해서 보이스톡을 걸었다.(국제전화 요금이 사실 너무 불안했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거의 10번은 죄송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어떤 멍청한 새끼가 자기 캐리어 하나 헷갈리냐고 짝꿍과 흠씬 욕해둔 게 내심 죄송스러웠다. 그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고 마지막까지 죄송하다고 했다. 휴. 풍선처럼 부풀어있던 불안이 프슈슈슈 하며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아,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그는 30분도 안 걸려서 우리가 있는 호텔로 왔고 그제야 나는 내 캐리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안에 들어있는 소중한 것들이 떠올라서 너무 감격스러웠다. 마치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 당시엔 정말 이산가족보다 더 그 가방이 반가웠다. 그는 마지막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떠났다. 그리고 카톡으로 또 죄송하다는, 여행 즐겁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때쯤 되니 우리가 본 손해는 생각도 나지 않고 그가 앞둔 대회를 잘 치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쿄에 대회 참가하러 온 격투기 선수라고 했음.)
캐리어와 함께 방으로 올라온 나는 형에게 폭 안겼다. 미안하고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지. 계획했던 거 다 하려면 우리 바빠, 옷 갈아입고 나가자. 캐리어에 가져온 옷을 갈아입으며 안도감이 들었고 그제야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만 같은 설렘과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우리가 4일 동안 함께할 여정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울지.
첫 번째 여행기를 올리고 난 뒤로 너무 바쁘게 보냈다. 아 참고로 일 때문에 바빴던 건 아니다. 그냥 마음이 바빴다. 날마다 좋고 편안하고 설레는 매일을 보내느라 마음이 바빴다.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오늘이 되었고 곧 잠들 것 같은 상태로 적었다.
지금 시점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짝꿍이랑 살짝 싸워서 마음이 심란한 상태다. 사실 최근 들어 싸운 적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 편안하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나의 그 오만이 결국 우리의 편안을 깨고 말았다. 나는 항상 한순간 마음의 샘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숨기지도 못하고 내비치고 만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편안하다고 느꼈을 순간들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형의 참음으로 유지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가 너무 스산하다. 미안하고 불안하고 심란하다. 이런 감정은 또 처음이군. 감정도감에 지금 감정을 기록한다. 다음에 또 이런 감정이 찾아오면 그땐 오늘보다 조금 더 세련되게 해결했으면 해서. 내일이 오면 다시 또 어제처럼 형을 사랑해야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사실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데, 사랑해서. 사랑하지 못한 후회는 남아도 사랑한 후회는 없다. 그러니 사랑을 해야지. 사랑을 한다. 사랑해.
놀랍게도 아직 여행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어딜 갔고 뭘 했는지 좀 세세하게 정말 '여행기'처럼 적어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뎌도 꾸준히 적어볼 계획임. 이 여행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편안해서 오히려 더 쓸 수 있게 된다. 누군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음,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누가 보는지도 모르게 봐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