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고유한 선택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다섯째로 태어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엄마 아빠는 빠듯한 생활을 꾸려가느라 바쁘셨고, 나는 늘 언니오빠들에게 맡겨졌다. 어리기만 한 막내 동생에게 심부름조차 보내지 못한 것은 사랑이었고 형제애였겠지만 다 큰 성인이 될 때까지 은행에 가볼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렇게 자란 탓에 20대에 혼자 결정하고 혼자 떠났던 두 여행은 터닝 포인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나를 믿어도 되겠구나'.
외동을 키우다 보니 아이가 어릴 때 남편과 나의 네 개의 눈이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시선이 흩어질만한 다른 대상이 없었다.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남편은 아이의 주변 위생에, 나는 아이의 안전에 유독 신경을 썼다. 그러다 아이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육아서 덕분에 우리의 시선을 조금씩 거둘 수 있었다. 아이가 자라 "육아"의 시간이 지나고 "동반"의 시간으로 바뀌면서 우리 부부는 시선을 아이가 아닌 서로에게로 다시 돌려보자 했다. 금세 시선이 옮겨지거나 완전히 옮겨지는 일도 아니었지만, 같이 해서 조금이나마 가능했다.
시선은 점점 부부에게로 옮겨오면서 반대로 선택은 점점 아이 쪽으로 옮겨가도록 했다. 아이의 연령에 맞도록 스스로 선택의 폭을 조금씩 열어 주었다. 적어도 인지하고 있을 때는. (어쩌면 인지하지 못하고 미리 선택해 둔 일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먹고 싶은 과자를 선택하거나 오늘 신을 양말을 선택하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거나"라는 말을 잘하는 아이였기에 가능한 정확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십칠 년을 살아온 아이에게 주었던 가장 굵직한 선택은 홈스쿨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공교육 외에도 다른 형태의 학교나 홈스쿨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6학년 2학기에 아이는 중등 과정에 대한 선택을 했다. 물론 그렇게 선택하기까지 3-4년 간 충분한 대화가 있었고, "네가 선택했으니 네가 책임지는 거야"라는 식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너의 결정 뒤에 아빠 엄마가 함께 있음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2년 간의 홈스쿨 후에 꿈틀리인생학교(갭이어 기숙학교)를 선택한 것도, 그다음 해에 지금의 거꾸로캠퍼스를 선택하는 것도 아이의 의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도록 했다. 아이가 공교육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 또한 존중했을 것이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지는 않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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