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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툇마루 Feb 22. 2024

다섯 아이를 키운 엄마, 외동아이를 키우는 딸

엄마는 아들 셋, 딸 둘 이렇게 다섯을 키우셨다. 어려운 형편이나 아빠의 무심함을 생각하면 "키워내셨다"는 단어가 정확할 것이다. 그 시대 아빠들은 다 그랬다는 한 문장으로 퉁치고 지나가버리기엔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가족 안에서 엄마의 고생은 수백 수천 개의 문장에도 다 담을 수가 없다. 다섯을 키우면서 경제 활동도 하셨을 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남편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공허함을 생각하면 더욱 힘에 부치셨을 것 같다.


그런 인생을 살아오신 엄마에게는 다섯째인 막내딸이 언제 "엄마"를 처음 말하고, 언제 걸음마를 처음 했고, 언제 첫니가 돋았는지 기억하는 것은 사치였을 것이다. 다섯 명의 태몽을 모두 기억하시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다섯째로 태어난 딸의 첫 경험이 무어 그리 대단했겠는가. 게다가 엄마가 기억하시지 못하는 나의 처음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이 없는 걸 보면 그것이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나 보다. 그보다 내게 남아있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떤 기억은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살게 하기도, 나를 괴롭게 하기도 하니까.


엄마는 최근까지만 해도 내가 막내로 자라 (그래도 어릴 때만큼은) 힘든 기억 없이 사랑받은 기억만 담고 있는 줄 아셨다. 언니 오빠들 다 학교를 졸업하고 열개가 넘는 도시락에서 해방되신 엄마는 막내 도시락 하나를 정성스레 싸던 때가 좋은 기억으로 남으셨나 보다. 서너 가지 반찬에 국까지 싸주었을 때 좋지 않았냐 종종 말씀하셨다. 게다가 막내가 누렸던 특권들을 말씀하셨지만 죄송하게도 그런 기억은 내게 중요치 않았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어두운 기억이 먼저 떠올랐고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그 어두운 틈바구니 속에서 기특하게도 밝게 자리 잡고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추억할수록 튼튼해져서 사는 동안 나에게 동아줄이 되어주던 추억이다. 


고3 모의고사가 있던 날 아침의 일이다. 시험 전 날 저녁에 잠들어버린 것을 탓했지만 사실은 시험이 두려워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때 조여오던 답답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렵게 학교에 못 가겠다는 말을 꺼낸 나를 이해하고 믿어주었던 엄마의 모습. 엄마는 전혀 기억하시지 못하지만 그날의 일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이 추억에 대해서 브런치에 썼던 글이 있다. "단 한 사람의 신뢰" https://brunch.co.kr/@circle73/174 )

그렇게 엄마는 나에 대한 사소한 기억을 가질 여유는 없으셨지만, 나를 믿어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다섯을 키운 엄마에 비해 하나를 키우는 나는, 아무래도 아이에 대한 사소한 기억들이 더 많을 것이다.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기억력 탓이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나면 아이가 언제 첫니가 났는지, 언제 처음 이를 뽑았는지, 언제 처음 뒤집었는지 아이가 정확히 몇 개월째였는지 기억하는 엄마들이 있다.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자위하지만, 세심한 기억력이 부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 번 더 말해보고 싶다. 그런 사소함을 기억해 주는 것도 중요지만 아이에게 어떤 감정을 남겨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엄마는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다섯 아이를 키우는 동안 놓쳐도 되는 것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정리하신 것 같다. 아이에게 무엇을 남겨주는 것이 중요한지. 마음에 무엇이 필요한지.

바쁘고 고생스러운 상황이 한 편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도 될까. 외동아이를 키우며 이 아이에게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바쁘게 몸을 움직이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를 쓴다. 일상을 흔들다 보면 머릿속의 생각도 흔들리고 그러는 와중에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바쁜 중에 놓쳐도 되는 것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17년을 그렇게 쫓아왔는데도 아직 까마득하다. 다섯 아이를 키우신 엄마의 내공을 쫓아가려면.


엄마의 딸과 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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