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째 주제는 답보상태이다.
발전된 글을 쓰지 못하고 피드백만 수용하기를 몇 주. 그놈의 ‘상큼’한 주제에 매달리느라 스스로 발목을 묶어놓고 있다. 올드해지기도, 식상해지기도 싫어서 고른 길이 ‘그냥 안 하기’라니. 교수님 퇴임 전 올해는 꼭 논문을 등재시켜야 하는데.
쓰려고 하는 작품에는 변함이 없지만,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주제는 약간씩 바뀌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너무 유명한 작품인 데다 오래된 작품이라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참 힘들다. 피드백 하나에 블랑쉬는 부적응자가 되었다가, 욕망의 화신이 되었다가 난리 부르스가 따로 없다.
모든 읽기는 오독이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천명한 이후로 더 이상 문학 읽기는 전지전능한 저자, 작품의 조물주인 작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은 세상에 나온 순간 그의 손에서 떠나가고, 작품은 텍스트로 치환된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이동은 저자의 의도가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결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제 텍스트에는 제3의 존재, 독자가 개입하고 무한히 다른 의미들이 생겨난다. 저자는 죽고, 독자가 탄생한다.
모든 독자는 텍스트를 마주하고 모든 읽기는 오독이다. 텍스트를 마주한 독자는 더 이상 수수께끼 풀듯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내가 가는 길이 길이요, 내가 읽는 것이 정답이라고 자신 있게 외쳐도 괜찮다.
당신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 말곤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과 공상과 속임수뿐이야!
블랑쉬의 모든 과거를 알게 된 스탠리는 윽박지르며 그녀를 위협한다. 블랑쉬는 끝없이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을 부르며 도움을 청한다.
블랑쉬가 만들어낸 모든 이야기들을 텍스트의 차원에서 살펴보자. 스탠리에게 블랑쉬의 이야기는 ‘정신 나간 여자의 한낱 거짓말’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에겐 또 다른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 블랑쉬의 거짓말 하나하나는 텍스트가 되어 독자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박사연습생 김씨는 저자의 의도와 더불어 선행연구의 권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블랑쉬가 직조해 내는 무수한 거짓말들에서 ‘독자’의 텍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기를,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