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이 May 30. 2024

우리 최선을 다해 실패해요.

성공하고 싶으면 내가 가장 못났다 여겨지는 모임에 가세요 .


흘러넘치는 성공 광고 속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는 똑똑한 박사 선생님들 사이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교수님은 아직 졸업하지 못한 제자들이 신경 쓰였는지 한 달에 한번 논문스터디를 열어주신다. 스터디에 꾸준히 참석하는 멤버는 총 네 명이다. 진작에 수료를 마친 그녀들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거나, 이미 다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거나, 국가사업 장학생으로 연구비를 받으며 연구를 하고 있다.


그중 마지막 멤버인 나만이 아직 수료하지 못한 재학생이며, 졸업 시험을 앞두고 있으며, 밀려드는 발표와 일로 논문 연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과 대학원생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좋은 기회가 생겨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며 어렵지 않게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공부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비슷한 일을 겸업하고 계시는 다른 박사 선생님께 주에 며칠 일하는지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유동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하며 4일만 일한다는 그녀.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일과 연구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균형을 잡기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잘해야지

내가 선택하고 벌려놓은 일인데 ‘잘’해야지. ‘잘’이라는 부사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시간이 없어도 잘 읽고 싶고, 잘 쓰고 싶고, 잘하고 싶었다. 결국 줄일 수 있는 건 잠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밤을 새우며 발표 준비나 과제를 하곤 했다.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수업을 듣고 다시 출근을 한 적도 있었다.


결국 꽃이 피어나던 올해 봄, 몸이 고장 났다.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내 건강도 곤두박질쳤다. 일주일에 두 번씩은 병원에 가야 했다. 충분히 자고, 몸을 회복하는 것에는 천금 같은 시간이 소비된다. 공부해야 하는 시간에 병원에 가야 하니 공부할 시간은 더욱 없고 결국 ‘잘’해내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


5월엔 발표가 3개나 있었다. 가장 최근의 발표는 푸코의 계보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평소 푸코의 후기 저작 위주로 읽었던지라 계보학은 푸코 사상의 기본임에도 제대로 된 내용을 정리하기가 꽤나 어렵게 느껴졌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쪼개며 겨우겨우 발표를 준비했지만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 수준 정도의 발표문을 완성하게 되었다. 교수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가 듣는 상황에서 그런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창피하며 고역이다. 당연히 좋은 피드백을 기대하기 또한 힘들다. 박사연습생 김씨는 또 좌괴감에 빠진다.


기꺼이 실패하려 하세요.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TED 영상을 하나 틀었다. 발표를 망쳤으니 집에 가는 차 안에서라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자 싶었다.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1분의 비밀”(The 1-miniute secret to forming a new habit)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사회학자 크리스틴 카터(Christine Carter)는  ‘없는 것보단 나은 행동‘(better-than-nothing behavior) 습관에 대해 소개하며 ‘기꺼이 실패할 의지’에 대해 얘기한다.


가끔 우리의 목표는 너무나 장대하고, 거대하고, 원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겁을 먹는다. 처음의 불타는 동기부여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기 마련이다. 동기부여는 자판기 커피처럼 누르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하지 못한 거대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받기보다는 처음부터 실패하리라 마음먹고 어떤 일이든 시작하라는 것이다.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마음을 가볍게 하고 무엇이든 하나씩 작게. 잘하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가벼워진다.


운전을 하는 짧은 20분 동안 ‘실패할 의지’에 대해 생각했다. ‘실패할 의지’는 ‘실패할 용기’보다 조금 더 가볍다. 용기도 부담스럽다면 실패할 의지로 그냥 하나씩 해보면 어떨까?


논문 연구도, 글쓰기도 단 한자라도 읽어보고 써보는 것이다. 다음 주에 있을 이번 학기 마지막 발표는 실패할 의지로 그냥 한 글자씩 준비해보려 한다. 여기까지 왔기에 돌아갈 수 없는 박사연습생 김씨는 오늘도 마음을 다 잡는다.













이전 02화 늘 죄송한 김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