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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이 May 23. 2024

늘 죄송한 김씨

“아랫집 천장에 물이 새.“


새벽부터 마무리하던 오전 수업의 발표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 즈음 관리사무소에서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여행으로 집을 비우신 부모님 때문에 강아지 펫시터 겸 본가로 잠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좀 넘었을 때였다.


발표문을 후다닥 끝내고 준비해서 나가야 하는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 아랫집 물이 샌다니…


“어머니 어디 가셨어?”

“아버지랑 여행 가셨어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근무하셨던 오랜만에 뵙는 아저씨의 물음에도 살갑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급해 누수 지점을 찾는 아저씨를 보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발표문을 마무리하러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로 와봐요! 여기 물이 새잖아. “


아저씨는 좀 앉으려고 하면 나를 부르고 또 불러서 누수의 원인과 아랫집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싱크대 배관에서 물이 새서 신속히 고쳐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네네, 고쳐야죠,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빨리 상황이 수습되기 만을 바랐다. 대충 문제를 정리한 아저씨가 가시고나니 수업까지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아 손을 덜덜덜 떨면서 발표문을 마무리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 정말 나갈 준비를 시작하려던 찰나, 아저씨가 다시 찾아오셨다.


“아랫집 한번 보러 가야지? 빨리 내려와요! “

“저 안 봐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야, 봐야지! 아랫집은 물이 새서 난린데!”


하필 오늘이 발표인 대학원생의 사정을 알턱이 없는 아저씨는 아랫집으로 나를 끌고 내려갔다. 아랫집에 사는 이웃분들은 다행히 화가 나진 않으셨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들어가자마자 인사와 사과를 동시에 드리며 물에 젖은 천장의 상태를 확인했다.


“빨리 고쳐야 해!”


결국 교수님께 늦는다는 전화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말하는 김씨. 오늘은 정말 죄송하기 싫었는데. 또 죄송한 김씨가 되고 말았다.


하필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지 않는 날에, 나 혼자 집을 돌봐야 하는 날에, 발표 날에, 물이 새다니. 심지어 나는 강아지 때문에 잠시 와서 살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쿠퍼는 왜 이름을 하필 머피(Murphy)로 지었냐는 딸에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또한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Seminar on the ‘Purloined Letter’)에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라고 말했다.


편지를 발견하는 그 사람이 바로 편지의 수신인이기에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내 앞에 벌어지는 일도 이미 일어났기에 그 운명의 주인공은 나이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상황을 수습하고 늦게나마 학교로 향했다. 기다려주신 자상한 교수님 덕분에 무사히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편지의 수신인이 우연히 편지를 발견하듯이,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하필 그때 아랫집에 물이 샌 것도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박사 연습생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젠 좀 그만 죄송하고 싶은 김씨는 그래서 오늘도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과 함께 뚜벅뚜벅 교정을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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