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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소녀 Apr 12. 2021

임신 9개월 만에 찾아온 아이.

조산아로 태어난 아이.

2013년 11월 10일.

눈발이 살짝 휘날리던 초겨울. 나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결혼 후 맞벌이를 하기로 한 계획과는 달리 뜻하지 않게 허니문 베이비를 임신하게 되었다. 남들은 임신 초기에 입덧이 심해서 음식 냄새조차 못 맡아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속이 비어 있으면 울렁거림이 심해지는 먹덧 입덧이었다. 오히려 음식을 먹으면 속이 편해져서 내 몸무게는 날이 갈수록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갱신해나갔다. 그러다가 어느덧 임신 9개월 차에 접어들게 되었다.


임신 36주 1일이 되던 날 저녁.

출산이 불과 한 달도 채 안 남았기 때문에 산모교실에서 배운 출산을 돕는 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바닥에 누워 양쪽 다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팔로 감싸 배 쪽으로 잡아당기는 순간 '어?' 무언가 느낌이 아주 이상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계속 누워있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임신 막달이라 방광이 눌려서인지 이날도 어김없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눈을 떴다. 그런데 뭔가가 몸 밖으로 내비쳤다.


나도 처음 임신을 해 보는 것이라 이게 이슬이 비친 건지 양수가 터진 건지 좀체 알 수가 없어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직 임신 36주 2일이기 때문에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은 이슬이 비친 것일 거라며 병원에 갔다 회사에 출근하려고 양복을 입고 병원으로 같이 갔다. 하지만 나는 불안한 마음에 혹시 몰라 미리 싸 두었던 출산 가방을 챙겨서 출발을 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증상은 계속되었다. 혹시나 배 속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두근두근 요동을 쳤다. 집에서 차로 아무리 빨라도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이 그날따라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해서 증상을 얘기하고 진료를 보기 위해서 진료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내 설명을 들으시더니 진료를 보셨다.

하지만 진료를 보시더니 양수가 터졌다고 하셨다. 양수가 터지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48시간. 즉, 이틀 안에 빨리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내가 임신 37주가 넘어서 그 출산 촉진 운동을 했어야 했는데 잘 모르고 36주에 그 동작을 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아기를 한 달 정도 더 배 속에 품고 있고 싶었는데 무지한 엄마 때문에 아기가 한 달이나 빨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출산을 맞이하게 될지 몰라서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곧이어 입원 수속을 았고 출산을 하기 위해 자궁을 수축시키는 유도분만제를 맞고 분만 대기실에 누워있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도분만제를 맞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인지 아직까지는 아무런 진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다른 산모들의 진통 소리와 거친 호흡소리에 내 심장은 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도 곧 저 엄마들처럼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힘겹게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무서웠고 잘 해낼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이럴 때는 남편보다는 친정엄마가 내 곁에 계시는 게 더 위안이 되었겠지만 친정엄마는 장사를 하고 계셨고 또 마음이 약하셔서 내가 아기를 낳느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할 것 같다고 예전에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어서 나보다 더 겁이 많은 남편이 내 곁을 지키게 되었다. 남편도 갑작스러운 이런 상황에 나보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있는 듯 보였고 얼굴색이 하얗다 못해 매우 창백해 보였다.

  

드디어 유도분만제가 내 몸속에 흡수되었는지 진통이 시작되었다. 마치 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듯이 통증은 주기적으로 나에게 밀려왔다. 통증이 올 때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으며 통증이 없을 때에는 그나마 심호흡을 하면 겨우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진통은 성난 파도처럼 점점 그 강도와 주기가 짧아져만 갔다. 그래서 간호사 선생님께 호출을 해서 무통주사를 맞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무통주사는 아기가 37주 이상이 되어야 맞을 수 있고 지금 우리 아기는 아직 36주 2일이어서 무통주사를 맞을 경우 아이가 못 견딘다고 하셨다. 무통주사만을 믿고 있었는데 맞을 수 없다니 청천벽력이었다.


이날 분만대기실에는 산모들이 넘쳐났다.(이날 알고 보니 12명의 산모가 아기를 분만했다.) 여기저기서 출산이 임박했는지 소리를 마구 질러대었고 간호사들은 출산이 임박한 산모들에게 가느라 매우 분주해 보였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나 또한 이런 통증은 처음이라 너무 아파서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했으나 내가 보아도 나보다 출산이 임박한 산모들이 많았기에 그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담당 의사 선생님이 산모대기실로 올라오셨다. 다급해진 나는 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호소를 했고 의사 선생님은 내진을 보셨다. 초산인데도 불구하고 자궁이 이미 6센티가 열려서 분만실로 급히 이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힘을 주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내 배 위로 올라가서 봉긋하다 못해 높이 솟아오른 내 배를 누르고 해 봐도 아기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담당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보러 다시 진료실로 내려가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분만실에는 남편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정적이 흘렀다.

  

시계는 이미 오후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유도분만제를 맞은 지 6시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고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던 나는 점점 체력적으로 지쳐만 갔다. 그래서 더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출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 그동안 했던 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고통을 참으며 노력했는데 제왕절개 수술을 받으면 너무나 억울할 것만 같았다. 사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고 통증이 올 때면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기에 남편이 의사 선생님께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또한 지금까지 노력을 해 온 게 너무 아깝고 조금만 더 하면 아기를 낳을 수 있을 거라며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다. 진료를 보러 내려가셨던 의사 선생님이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다시 분만실로 올라오셨다. 나는 이번에 못 낳으면 정말 더 힘든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간호사 선생님들이 힘을 주라고 했을 때 힘을 주고 또 힘을 주었다. 시곗바늘이 오후 4시 58분을 지날 무렵 드디어 9개월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리 튼튼이(태명)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이는 3.02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고 임신 9개월인데 3kg이 넘으면 큰 편이라며 아마 열 달을 다 채우고 나왔으면 자연분만으로 낳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제일 먼저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10개씩인지 간호사 선생님들께 여쭤보았다.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분만실에 가득 울려 퍼지자 드디어 끝났다는 마음에 안도가 되었다. 남편은 간호사 선생님이 건넨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나는 혹여나 탯줄을 자를 때 아기가 아플까 봐 걱정이 되어서 눈살이 같이 찌푸려졌다. 간호사 선생님은 아기의 얼굴을 잠시 보여주셨고 아기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다. 남편은 시부모님과 장모님에게 아기를 잘 낳았다는 전화를 드리러 분만실 밖으로 나갔다. 9개월 동안 터질 듯이 올라와있던 내 부풀어진 배를 누워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출산을 함과 동시에 푹 꺼질 것만 같았던 내 배는 언제 출산을 했냐는 듯이 아직도 어마어마하게 부풀어 있어 보였다. 출산을 마치고 회복을 도와주는 링거를 맞으며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회복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동안 이상하게 갑자기 친정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엄마도 '나와 우리 오빠를 이렇게 힘들게 낳으셨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태어났을 때 3.8kg, 오빠는 4.7kg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눈물을 많이 흘리면 평생 눈이 시린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친정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조차 눌러 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이러한 힘든 과정을 보여드리지 않은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회복실에서 주사를 다 맞고 휠체어를 타고 입원실로 올라왔다. 이미 하루 해가 다 저물어서 창밖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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