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에게
아들이 백일 때 남편은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나는 시집에서 1년 동안 아이와 지냈다. 매일 저녁마다 울며 전화를 했다. 내가 울 때면 돌도 안된 아들도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아기가 소리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이는 본능적으로 엄마가 슬퍼하는 것을 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시댁 방 한 칸이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을 아기도 직감한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함께 울면서 잠이 들었고 잠든 아이를 보며 나는 또 울었다. 아들과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아들은 7살 유치원 때까지 나와 분리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다.
결혼하면서 남편은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유학으로 신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기를 갖고 아들이 백일이 될 때 아들과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1년 은 하루가 1년 같았다. 그렇게 눈물로 낳은 아들을 언젠가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기로 맘먹었다.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아 아들이 만 18세 성인이 되어서야 캐나다로 유학을 보냈다. 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듯 아들도 나를 그리워하며 1년마다 엄마를 찾아 한국에 돌아온다. 그렇게 캐나다에 간 아들은 엄마, 아빠를 닮아 강한 아들이 되었다.
오늘은 친정식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들이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급히 모이기로 했다. 우리는 친정 부모님 산소를 들려 인사를 드리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아 내가 좋아하는 바다에 들렀다. 제주에 살던 나도 서울로 유학을 갔었기에 서울에서 돌아오면 꼭 이 바다를 찾아왔다. 아들은 아기 때 엄마와 함께 한 곳을 보며 느꼈던 그 마음을 지금까지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도 내 친정 바다를 즐겨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같은 것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나눈 아들은 캐나다에 간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결혼하고 캐나다에 가서 임신을 했을 때 남동생 결혼으로 한국에 잠시 들렸었다. 그때 큰언니는 첫 사제 서품 받는 미사에서 안수를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큰 축복을 받았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 아들을 사랑하며 위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있다. 아들은 나에게 축복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