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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Nov 21. 2023

살아가라, 한 번도 회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수능 막바지, 한 달여를 앞두고 큰딸은 갑자기 열혈 재수생 모드에 돌입했다.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각이 계치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지난 9개월여 동안 밤과 낮이 바뀌어서, 학원에 안 가는 날은 10시간 가까이 수면 중이었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많아야 5시간 안팎이었다. 동네 지인들을 만나면 우리 딸은 미국 있다고 반농담을 했다. 시차가 맞지 않아 얼굴 보는 시간은 저녁에 잠깐 이었다.



딸아이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자는 시간이 5시간 안팎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대부분  공부에 쏟아부었다. 밥 먹을 때 인강을 듣고 화장실에서 영단어를 외우는 열혈 수험생 생활이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또 부지런히 검색을 하여서 좋은 교재들을 사재기 시작 했는데, 집에는 아직 활용하지 못한 교재들이 많았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으나, 필시 한 달 안에 다 풀지 못할 교재들을 사 모으는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교재 값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고, 아이는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교재 값을 결제했다.

나중에 동생도 쓸 수 있는 좋은 교재라는 것이 큰딸의 지론이었지만, 나는 이제라도 발동된 아이의 욕구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고, 늦더라도,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라는 진리를 체득하기를 바랐다. 10을 이루려면 100 만큼의 허튼짓도 필요한 법이고 100을 성취하기를 원하였으나 90을 흘려보냈다면, 부스러기 일망정 10을 부여잡고 실행하는 것이

이제라도 하는 것이, 모든 시작의 첫걸음이라는 진리를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수능 전날, 작년에 썼던 도시락 통을 꺼내 씻어 놓고, 쉬는 시간에 먹을 커피와 에너지 바와 초콜릿을 준비했다. 아이가 원하는 커피가 집 근처 마트에는 없어서 걸어서 20분은 더 걸리는 마트로 사러 갔고, 작년에는 수능 찹쌀떡도 사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서, 또 20분을 더 걸어가서 유명 프랜차이즈에서 나온 초코 찹쌀떡을 샀고, 오는 길에는 저녁에 먹고 힘내라고 추어탕도 샀다. 아이는 추어탕보다는 초코찹쌀떡에 흠뻑 빠졌다. 저녁에는 소고기 뭇국과 취나물과 계란찜을 만들어 두었다.



수능날 아침 일찍 준비해서 새벽 6시 30분 집을 나섰다. 아이는 비교적 가까운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함께 걸어갔다. 아이의 가방은 학교에서 보려는 교재들로 꽤 무거웠고, 나는 도시락 가방과 간식과 담요가 들어 있는 에코 백을 들고 걸어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스름 어둠이 깔려 있는 거리에는, 차들도 꽤  움직이고 있었고,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육교 밑에서, 나란히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까치집 진 뒤통수를 긁적이며 하품을 했다.



드라마'미생'에서 장그레가 새벽에 일찍 기원에 가면서, 아무리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도 거리에는 항상 자신 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일찍 집을 나서야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세상에는 나보다 더 빠른 사람, 더 부지런한 사람,  더 능력 있는 사람, 더 많이 실천하는 사람, 더 잘 극복하고, 더 많은 고난을 이겨 내고, 더 큰 성취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는 멋모르던 작년 보다 지금이 더 긴장된다고 했다. 맞아 본 매가 더 무서운 법. 학교 앞 사거리는 많은 차들로 붐볐고, 경찰관들 여럿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수고로운 아침이었다. 도시락 가방을 건네고, 손을 흔들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그리 애틋하지는 않았다.

작년에는 그 쪼그맣던 애기가 언제 이리 다 커서 수능을 보다니 하며, 혼자 울컥했었다. 작년에는 수능 시작 시간까지 교문 앞을 서성거렸으나, 이번에는 십 분가량 머물다 왔다.




대학을 갈 가능성이 없음에도 나는 그때, 학력고사를 보았었다. 그때는 첫눈이 온 다음이고 춥기도 많이 추웠다. 대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엄마들이 교문에 엿을 잔뜩 붙여

놓고 합격을 기원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 집에서 잤고, 친구 어머니가 싸주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싸갈 수 있었다. 시골 우리 집에서는

시험을 보러 새벽에 시간 맞춰 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방 한 칸 얻어 하룻밤 자고 시험장으로 데려다줄 생각이 있는 가족도 없었다. 각자의 삶에서 지쳐 있었다고 해도, 돌아보면 나는 어렸으니, 그때만큼의 이유로 나는 오랫동안 나는 엄마와 언니를 원망했다. 다들 나를 다 큰 사람 취급 했지만, 나는 19살짜리였다. 운 좋게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보는 친구의 도움으로 시험은 볼 수 있었지만, 결국 면접을 못 갔다. 면접을 갔어도 대학은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즐거운 추억으로 회상한다. 샌드위치는 일로 감싸서 점심시간까지도  따뜻했고, 국어 시간에 첫 번째 문제가 금오신화를 묻는 쉬운 문제가 나왔다고

기억한다. 그 내가 좀 더 이기적이었거나, 나를 더 믿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뒤늦게 간 대학에서 심리학이 재미있었으며, 교수님이 상당히 멋있었다고, 끝내는 졸업을 못했지만, 배움은 즐거웠다고 기억한다. 나는 마치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회피했던 나를 사랑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이,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드라마 스토브 리그의 백 승수 단장의 말처럼  그 상황에 내가 진 것이라도 살아온 여정을 사랑하고, 아이가 느리게 차오르며 걸어갈 여정도 응원한다.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고단 했기에 한잠 자고 난 후, 수능 덕분에 학교를 안 가는 둘째를 깨웠다. 친구와 영화를 보러 나가는데 비 온다며 툴툴 거리며 둘째 딸이 외출한 후,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밥을 차려서 먹고, 설거지를 하고, 예약된 정수기 점검을 받았다. 살아가며 극복하고 이겨 내야 하는 상황들도,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동들을 계속 해내며, 작은 정성과 무난한 신념으로  기적을 이루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것들을 향해 삶을 이어가는 것이고, 세월은 그것을 이루어 주는 것이리라.




시험을 끝내고 나온 아이는 작년만큼이나 못 봤다고 했다. 성적은 비슷할 거라고 했다.

실수로 틀린 아까운 문제들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하며. 시험 전에 흩어본  내용이 몇 개 나왔다고 했다. 역시 벼락치기, 초치기도 중요하다. 함께 외식을 하자고  했지만 큰딸은 피곤하다며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했다. 한동안 참았던 마라탕을 시켜 먹고는 잠들기 아깝다며, 수능시험지를 다시 풀어 본 큰 딸의 결론은 성적이 조금은 올랐다는 것이다.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자신도 공부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은 성취로 큰 딸이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며, 일상 속의 작은 성공들로 자기만의 기적을 만들기를 나는 소망한다.

한 번도 회피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를, 자신이 원하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다듬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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