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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Aug 26. 2024

엄마의 빨간 다라에는 그것이 있었네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에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다.


열무 삼십 단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엄마는 열무 삼십 단도이고 장에 가기도 하고,

장마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캔 뽀얗고 튼실한 마늘을 골라, 아버지가 봉당에서 엮은 마늘을 열 접을 이고 가기도 했다. 푸성귀가 지천으로 나는 여름날이면, 애호박도 따고 졸, 대파 아욱이며  시금치, 상추, 콩꼬투리도 따서

커다란 보따리로 묶어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서  시장으로 향하는 육교 위, 양 옆으로 나란히 앉은 여자들 사이에 섞여 앉아서 팔았다. 아침을 먹고 나면 엄마는 바쁘게 콩대를 한 줌씩 짚으로 묶어서 다발을 만들고, 시금치도 도려내고 아욱도 다듬고 뒤란 우물가에서 가지도 따고, 텃밭에 나가서 밤새 한 뼘은 자라 있는 오이도 따고, 토마토도 땄다.



엄마는 그 작은 몸으로 다이고 지고 가지도 못할

보따리를 두보따리나 만들어 하나는 이고 하나는 들었다. 보따리를 차부까지  들어다 달라는 말에 나는 툴툴대며 화를 내곤 했다.

걸어서 십오 분가량 걸리는 거리를 짐을 들고 걸어가는 동안 만나는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의

쓸데없는 참견이 제일 싫었다. 심술궂은 큰엄마는 버리장머리 없이 인사도 안 한다고 타박을 했다. 큰엄마는 엄마를 구박하고 시집살이를 시켜서 싫었다. 그래서 인사를 안 하니 그 또한 꼬투리가 되어서, 계집애가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은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니들이 잘해야 한다고 훈계를 했다. 버스가 도착하면 짐을 싣는 와중에 들리는 버스기사의 핀잔도 겸연쩍고 버스 뒷칸에서 윗동네 남자 애들이 보는 것도  싫었다.

나는 궁색함을 듵키는게 창피했다.

아버지가  술독에 빠져 있지 않을 때는 지게로 보따리를 져다 주는 날도 더러는 있었지만, 그런 날은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어떤 날은 엄마의 보따리를 차부까지 들고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차부가 보이는 마을 회관 앞에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장날이라 차부에 동네 사람이 많았다.

또 어떤 날은 뒷 울대까지만 들고 가기도 했다.

열여섯의 나는 아무리 착하고 순 했어도 철이 없었다.  가난한 엄마가 힘들게 보따리를 이고 지고 시장에 팔러 가는 것도 싫고, 동네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도 싫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고만큼이라도 철이 없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랬으니 지금의 내가 이만큼은 가벼울 수 있다. 딸들의 철없는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 덕분이다. 지금의 나라면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없는 가난 앞에서 엄마처럼 이고 지고 무엇이라도 내다 았을 것이다. 창피한 게 다 무언가, 아버지가 돈 달라고 하면 항상 하던 말처럼 땅을 암만 파도 십원 하나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도둑질 빼고는 다 했을 것이다. 열여섯의 나는 철이 없고 어렸고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다. 그늘 한점 없는 뙤약볕 다리 위에서 하루 종일 쫄쫄

굶어가며 푸성귀를 천 원 이천 원에 팔았을 엄마는 감자 껍질을 벗겨 멀건 된장국을 끓여 저녁을 먹고 치운 어두운 저녁이 되어 서걱거리며 돌아왔다. 집을 나설 때의 커다란 보따리는 부피가 줄어 빨간 다라 하나만 가득 채워서 이고 돌아왔다. 고단했을 엄마는 양철 밥상에 감잣국과 김치를 담아 밥을 차려 와도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장 봐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좁은 안방 바닥에 늘어놓았다.


우선은 가장 큰 것은 삼양라면 한 박스였다.

아무나 함부로 끓여 먹을 수 없고 국수와 함께 섞어서 늘려서 끓여 먹어야 했던 삼양라면.

그러나 가끔 몰래 끓여 먹기도 하고, 생으로 부셔 먹기도 했다. 자반고등어, 새우젓, 조개젓등 입이 짧아 반찬을 아무거나 드시지 않고 짭짤한 것들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위한 반찬거리들을 늘어놓으셨다. 성냥이나 비누 치약등 국수 밀가루와 돼지고기 두어 근이 핏물이 배인  신문지에 둘둘 말려  엄마의 빨간 다라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점에서 파는 알록달록하고 맛있는 과자가 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 온 물건들을 하나씩 늘어놓는 엄마의 얼굴은 형광등 불빛아래 선뜻하게 빚 났다. 흡사 전쟁터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내어놓는 장수 같은 뿌듯함이 보이기도 했다. 어쩌다 시장통에서 통닭이라도 튀겨 오는 날엔 개선장군이 따로 없었다. 우리들은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와'소리를 내며 달겨들어 입가에 기름칠을 했다.


"시장에 가면 읎은 게 읎어!" "반찬들이 쭉 나래비 서서 골고루 있어, 돈만 있으면 좋은 시상이여!"

" 김치면 김치, 젓갈이면 젓갈, 나물이면 나물, 장이 찌면 장아찌! 골고루 다 있어. 밥만 있으면!"읎은 게 읎은 좋은 시상에서 엄마는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땡볕에 앉아서 푸성귀를 팔았을 것이다. 간혹 맘씨 좋은 누군가 건네준 떡 한 덩이로 허기를 달래면서, 또는 누군가에게 삶은 고구마 한 개를 건네 함께 끼니를 때우면서.

엄마는 그곳에 있기 위하여 소리 없이 부단한 전쟁을 하였다. 자리싸움도 하고 진상손님과 실랑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든든한 뒷배가 되는 양

남편과 아이들을 떠올렸겠지, 빗자루 몽둥이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손재주 젬뱅에다가, 자전거도 못 타는 기계치 술태부 남편이라도 집에 있고, 올망졸망 아이들이 있고

세상 모진 풍파를 다 가리지는 못하지만 낮은 담장의 집이 있으니 엄마는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늦은 저녁 엄마는 자신의 전리품을 품은 빨간 다라와과 함께 돌아왔다. 엄마의 빨간다라에는 긍지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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