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방에 사는 여자 Jul 06. 2024

일 인분의 삶을 위하여.

내리는  숲에는 아직 끝맺지 못한 이야기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다 털어 버리지 못하여 글을 쓰나, 글 속에서도 다 털어낼 수가 없다. 오늘은 비 오는 저녁숲길을 걸었다. 새들은  날개를 접고 잠들어 있다. 고개를 들어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화창한 날이면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재잘거리던 들은 어느 나무에서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 있으려나? 서서히 어둠에 잠기는 숲은 고요하다. 한자리에 서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고,  숲에 깃드는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숙명일까? 나무를 생각한다.


걷는 와중에, 왜 나를 미워 하나, 왜 나를 궁금해하지 않나, 억울하던 마음들이 잦아들어, 그들도 그럴만했구나 알아차린다.  못다 한 말들을 부르르 털어 버리고 기꺼이 미움과 분노를 덧입으며 걷는다.



이제 자매들이 모인다.

한 그릇 속의 식혜 밥알처럼 동동 떠있던

자매들이 다시금 모이는 것은 나의 애씀 덕분일까? 필요 때문일까?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하고 매년 김장김치를 보내고 열무김치를 한 보따리 들고 가서 말없이 문 앞에 놓아두고 오던 나의 애틋함 덕분일까?



언니는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것을 좋아한다는 동생의 지나가는 말에 자매들이 만나는 자리에 아무것도 싸들고 나가지 않았다.

밑반찬도 김치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바리바리 싸들고 나가서 동생에게 주었을 것이다. 물론 동생은 나에게 늘 고맙다고 맛있다고 잘 먹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인 줄 안다. 무겁게 들고 와서 주는 사람.

재미있는 것을 함께 나누고픈 사람은 아니다.

자매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나는 크게 이중적이지 않으면서도 이중적이라는 말을 듣고 대단히 위선적이지 않음에도 위선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한 척한다는 말을 듣는다. 남편에게서 아주 오랫동안 들어오다 보니 그 말들이 사실일 것 같은 마음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왔다. 이제는 자식에게서 그 말을 듣는다. 불쌍한 척하지 라고, 이제야 비로소 미움받을 용기가 생겨서 그 줄을 놓았다. 그 욕심의 팽팽한 줄을 놓고 미워하는 마음도 무시하는 마음도 지나갈 길을 낸다. 가까운  거리에서 쏘는 화살이 가장 아픈 곳을 찌른다.

나는, 가깝고 만만한 거리에 있었을 뿐이다.

다 그럴만한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별일 아니었구나.



벌써 30년 전, 가난했던 어느 날 극장 앞에서 동생과 동생의 지인들을 한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비 오는 여름날이라 날은 덥고 습했는데 간단한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갔었다. 아마도 일자리를 구하러 면접을 다녀오던 길이었을 것이다.

그때 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온 동생이 말했다. "언니 시람들이 언니 나이 들어 보인데 머리도 촌스럽고 옷도

이상하대 스타일 좀 바꿔봐".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다가 화를 내며 빗을 던졌다. 동생은 괜히 말했다며 우물 거렸다.

나는 그때 동생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그 사람들 이상하니  만나지 말라고 했던가?



얼마 전에 그 기억이 떠올라  궁금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동생은 그들에게 뭐라고 했을까? 웃으며 가만히 있었을까? 우리 언니가 좀 촌스럽다며 맞장구쳤을까?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며 쏘아붙였을까? 너네들도 촌스럽다고 한소리 했을까? 그때의 분위기는 두 번째였다. 나의 착함에도 불구하고 존중을 받지 못했으므로.



두 딸들에게  각각 집에 혼자씩 있을 때 물어보았었다. 아는 사람들이 네 앞에서 자매를 비웃을 때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아이들은 내 언니, 내 동생한테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칠 것이라 했다. 너나 잘하세요!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의든 타의든 멀리서 함께 나를 비웃었을  동생은 나의 사는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 얼굴은 일생동안 남편이었다가, 때로는 자식이었다가, 나 스스로였다가,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우산을 쓰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보드라운 흙 길을 찰박찰박 걷는다. 이 걸음이 새들의 단잠을 깨우는 것은 아닐까? 걷다 보니 다 별일 아닌 마음이 되어 예쁘게 살아가보자고 다독인다. 동생이나 언니는 주변에 사람이 항상 있고  나는 늘 없다. 언니나 동생이 외롭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고 나는 외로움과 잘 지내니 다행이다. 부모에게는 예쁜 자식이 따로 있는 법이고 나는  어느 것 하나에도 끼지 못하는 자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자매들에게도 존중받지 못했을 터, 아버지와는  다른 남자를 찾아 얼렁뚱땅 한 결혼은 사실 너무도 외로웠다. 아귀가 맞지 않는 관계 속에서 삐걱거리며  자라난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고 이제와 나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시간들을 살아온 나를 내가 안다.

그 수고로움과 애씀을 내가 안다.

나이 듦이란 놓여 날 수 있어서 좋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을 놓았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놓았다.

헌신으로 키운 자식도 화살을 날리는데

자매고 남편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이구 엿같은 인생. 역시 자식이 스승이자 거울이다.

화살을 맞을 수 없이 멀리 도망가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비와 발걸음들로 소란하던 숲은 조용해지고. 나도 적막해졌다. 



받을 생각도 없는 돈을  갚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 늘어놓는 언니와 나는 닮았다. 다분히 받을 만한 미움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우유는 마셔야겠고 설사는 하기 싫은 것이다.

사랑은 못받이도 미움은 당당하게 받자.



나는 당당하게 한편 먹고 싶었다. 자매들과도 남편과도 아이들과도 한편이 되고 싶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을 보면  충만하고 당당한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불행의 외투를 입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니 자매들이나 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자식에게도 비난받는다고,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일 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나는 누구의 삶도 품을 수 없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