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사뭇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 하나, 불안을 한켜, 한켜 내포하고 있다. 불안은 모를 때 온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일인지 모를 때,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모를 때, 아이들이 지금의 상태로 계속 살게 될지, 지금 보다 나아질지 어떨지 모를 때 불안이 일어난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걷기 위해 나선 길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크고 날카로운 엠블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저쪽이 신호가 바뀌었으니 이제 이쪽 이겠구나 기다리고 있던 차에 들려오는 앰뷸런스 소리. 도로 위의 차들은 옆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내어 주었다. 앰뷸런스는 중앙선을 넘어 사거리 한복판을 가로질러 달려갔고, 뒤이어 소방차 몇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불안한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꼬리를 감추는
도시의 저쪽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겠지. 부디 무탈하기를, 도시의 안녕을 빌었다.
저녁 8시의 바람결은 보드랍고 싱그러웠다.
천변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집에서 출발해서
십오 분 정도 소요되고, 세 개의 건널목을 건너야 한다. 세 번째의 건널목에서 멈춰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하얀 종이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는 모습이 보였다. 어? 붕어빵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나? 반가운 마음에 까치발을 하고 한껏 기웃거려 보았으나 나뭇잎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작년 봄부터 등장한 붕어빵은
커피와 함께, 걷는 길의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붕어빵 아주머니는 겨울에 붕어빵과 꼬치 어묵을 팔기 시작해서 벚꽃이 흩날리는 봄까지 팔았고, 여름에는 강원도 찰 옥수수와 매운 어묵을 팔았다.
붕어빵 노점 앞에는 할머님들이 단골처럼 항시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계셨는데, 붕어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며 잠깐씩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거, 모자 이쁘네!" 한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말씀하셨다. 내가 걷기를 할 때 쓰는 챙이 넓은 모자를 향해하시는 말씀이다.
"네! 엄청 편하고 시원해요! 이렇게 벗어서 돌돌 말아서 가방에 넣어도 구겨지지 않아요"
"내 모자는 이렇게 끈이 있어서 바람 불어도 날아가지 않아!"
"내 제 것도 이렇게 끈이 있어서 날아갈 걱정이 없어요!"
이렇게 모자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작년에 무릎 수술하고 아들한테 업혀서 화장실 갔던 이야기로 순식간에 뻗어 나아갔다.
천변길을 홀로 오가며, 붕어빵 노점이 주는 익숙한 다정함에 마음이 편했다. 나를 반겨 주는 것이 여기 하나 더 있구나, 그러한 마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 두 달가량 문을 열지 않았던 붕어빵 노점이 문을 열었다.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진한 주황색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서니, 뿌연 김이 서린
흔들리는 노란 알 전구 불빛 아래에서 낯선 얼굴의 아주머니가 붕어빵을 굽고 있었다.
"새로 바뀌셨나 봐요? 한동안 안 여시 더니...."
"네! 바뀌었어요 그래도 반죽이 메이커가 같아서 맛은 같을 거예요" 아직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붕어빵에도 메이커가 다 있나 봐요?" 했더니
"그럼요, 메이커가 다 있지요, 이 회사 반죽이 제일 맛있어요"한다. 전의 아주머니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일 년 동안 오가는 길목에서 정이 들었던지, 혹시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본다고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또 알아도 또 어쩔 것인가 싶어,
이천 원에 세 개 하는 붕어빵만 사서 그냥 나왔다.
한동네에 15년쯤 살다 보니 저 점포가 전에는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한다. 그 장소에서 있었던 사소하고 특별한 추억들이 사라진 공간에서 맴돌고 있다. 이제는 이사를 가서 연락이 끊긴
동네 지인들과 점심을 자주 먹었던, 무말랭이가 맛있던 보쌈집은 카페로 바뀐 지 오래이고, 큰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 싶다며, 자기들끼리 들어가서 의젓하게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고 맛있게 먹었던 파스타 집은 몇 번의 폐업과 개업을 거쳐서 지금은 핸드폰 매장이 되었다. 지난주에는 둘째랑 자주 가던 국숫집이 편의점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던 둘째는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오면 다시 나가기 싫다고 밖에서 저녁을 먹고는 했는데, 혼자 먹기 싫다고 엄마를 불러 내곤 했다. 그렇게 둘이 수다를 떨며 저녁을 먹고는 했다.
좋아하는 벤치로 가서 붕어빵을 느긋하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 하고 팥은 달콤했다. 사방은 적당히 어둡고 바람은 적당히 살랑거린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하다. 내가 앉은 벤치 앞으로 사람들은 빠르게 걷기도 하고, 몇은 달리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가하게 걷는다. 적당한 어둠은 익숙한 것들을 가려주고 새로운 것들을 일깨워 준다. 어둠 속에서는 발걸음도 더욱 다정해지고 불빛도 생기를 되찾는다. 나의 걸음은 무엇을 잠재우고, 무엇을 되살릴 것인가? 나는 나를 향한 질문들로 오늘의 불안을 덜어 내며 어제처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