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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Oct 10. 2024

어느 날,  엄마가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그 해 1월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왔다.

그날은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는 날이었다. 야간조 근무를 마치고 새벽 6시에 퇴근해서 두 시간가량 잠들어 있을 때였다. 스물한 살의 나는 3교대 하는 공장에 다녔다. 언니도 같은 공장에 다녔는데  친구랑 방을 얻어서 공장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나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날은, 방이 비었을 때 자꾸 물건이 없어진다고

언니가 퇴근하고 와서 자라고 했다. 언니는 A조 나는 B조였다. 언니랑 언니 친구는 출근을 하고 나는 퇴근을 해서 언니의 자취방에서 잤다.

스물한 살의 나는, 낮에 도둑이 수시로 드나들며 등장질을 해대는 방에서 떡 하니 잘 정도로 자신을 허술하게 대하였다. 그때까지 삶은 나에게 대체로 친절하지 않았다.



엄마가 어떻게 그 먼 길을 왔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회사가 제법 컸으므로 물어 물어 찾아왔을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겠지! 지금이야 신도시가 들어서서 길이 잘 뚫려있지만, 그때는 시내에서 내가 다니는 공장까지 오려면 꼬불꼬불 길을 버스를 한참 타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털털거리며 달리다, 마렵지도 않았던 오줌을 지릴 지경이 될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를 세 번은 갈아타야 하는, 한나절은 걸리는 거리였다.

엄마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그 길을 새벽을 짚어 와서는 탕! 탕!  두드렸다. 일주일 전에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던, 남동생이 죽었다는, 아니 죽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다가 깨서 정신이 없던 나는, 허둥지둥 세수를 했다.




동생은 전에도 하루 이틀정도는 길을 후미고 돌아다니다 때가 되면 돌아오곤 했다. 밤새 돌아다니다 어디서 얻어맞아서 눈이 퉁퉁 부어서 오기도 했다. 식구들이 잠든 밤에 사라진 동생이 하루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나날이 커가는 동생의 힘도 감당이 안 되고,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동생이 차라리 이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멀리까지는 돌아다니지 않는 듯했다.



내가 공장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도 동생은 집을 나갔다. 나는 또 며칠 사이에 돌아올 거라며 엄마를 안심시키고 짐보따리를 꾸렸다. 삼사일이 지나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혹시 물에 빠져  죽었나.  바닷가에도 가보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돌아다녔다. 어느 기사식당에서 엄마는 어떤 남자아이가 버스에 치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미성년자인 듯하여 신분도 알 수 없고, 비슷한 인상착의로 실종신고가 들어온 것도 없다고 하였다.

동생이 으레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는 실종신고 같은 건,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신문에 광고까지 냈는데 소식이 없어서 무연고자로 처리될 수도 있다고 했었다. 엄마는 그 소식을 초등학교 선생님인 작은 아버지에게 전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엄마가 동생을 보면 까무러 친다고 두고 병원으로 갔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아들이 죽었음을 직감하고 밤새 덜덜 떨다가 두려움 속에 딸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 도시의 병원마다 돌아다니며 영안실에 동생과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자아이가 있지는 수소문을 하였다. 그렇게 헤매고 다닌끝에 어느 병원 영안실  한쪽 구석, 차가운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누워있던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영안실 직원이 시체 안치실 문을 열고 동생을 꺼내 보여 주었다.

몸은 크게 상한 곳이 없이 멀쩡했다. 다만 머리에 큰 상처가 있는 듯했다. 뒤통수에 피딱지 같은 게 언뜻 보였다. 짙은 밤색의 스웨터를 입고 다갈색의 골덴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맡 검정 비닐봉지에는 시장에서 튀긴 통닭이 들어 있었다. 냉동고에서 꺼낸 동생의 주검은 철저하게 사실적이어서, 한달음에 달려와 눈물 바람을 하니 외숙모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비쳤다. 외삼촌을 닮아 갸름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던 동생은, 외갓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길을 너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직행버스에 치어 죽었다. 시장에서 통닭 한 마리를 튀겨서 어린 시절 나랑 손잡고 간간이 가던 외갓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나 보다. 일주일 전, 공장으로 떠나 던 날 읍내 버스 정류장에서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외사촌 동생은 머뭇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남동생이 잘 있는지 물었다. 동생이 며칠 전에 집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잘 있다고 말했다. 외사촌은 버스 정류장에서의 사고에 대해 전해 듣고 내 동생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엄마가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동생도 빨리 찾았을 것이다. 엄마의 애끓는 모정이 없었다면 동생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을 테고,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평생 지새웠을 것이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돼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동생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이주일 만에 죽었다. 언니와 내가 반반 부담하여 병원비를  냈었다. 엄마와 함께 동생이 좋아하는 밥과 반찬들과 좋아하는 음식들을 장만해서 면회를 갔었다. 여기 있기 싫다고 데려가 달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동생이 애처로웠다. 의사는 동생이 자꾸 담배를 달라고 해서 덩치 큰 형들에게 맞는다고 말했다. 새벽마다 물 한 그릇 떠놓는 엄마의 푸른 치마가 처연했다.



하필,  그곳은  놀이 공원 가는 중간 지점에 있었다. 엄마랑 버스를 타면 데이트를 가는 연인들이나 나들이 가족들의 유쾌한 수다가 버스 안에  넘쳤다. 더불어 맛있는 냄새도 진동했다. 새벽부터 준비한 이 맛있는 도시락을 싸들고 놀이공원을 가는 길이면 더 좋았을까? 그때는 사실 그 어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루하고 비루한 삶에서 살아가기 급급했다. 다만, 침을 꼴깍 삼키는  엄마의 마른 목울대를 쳐다볼 뿐이었다. 친척집에서 얻어온. 푸른 점무늬가 박혀있는 블라우스는 엄마의 몸피 보다 너무나 컸다. 자신만을 위한 옷을 입지 못하였던 엄마. 그럴 겨를이 없었다.



동생을 데려왔다. 좋아져서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동생은 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때려 부꼈다. 벌거벗고 뛰어다녔다. 말리다가 엄마도 얻어맞고, 나도 맞고, 동생도 맞았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묶어 놓으니, 큰엄마가 와서 왜 애를 묶어 놓느냐고 나무랐다. 동생을 묶어 놓는 애가 바로 나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못 갔다. 동생은 그나마 내 말을 들었다. 내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큰엄마가 혼냈다.  "너는 집안이 이 꼴인데 수학여행이 대수냐!"나는 수학여행 못 가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이 꼴이라서 힘들었을 뿐이다.



중학생이 된 동생은, 어느 날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쏘다니다가 밤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사촌 오빠는 요즘 애들이 본드를 흡입하거나 부탄가스를 마신 다더라는 말을 전했다. 동생은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한두 살 어린 동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엄마는 학교를 몇 번을 불려 갔다. 동생은 그 무렵부터 행동이 불안정해지고 학교가 기를 싫어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까마득한 세월의 꼬리를 짚고, 오르고 올라 봐야

각각의 업들로 채워진 까닭들이 어렴풋하게  보일뿐이다.



초등학교시절 나는 지독히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다. 이 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글을 읽고 이름 석자를 쓸 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나뭇가지로 글씨를 써봤다. 글자들을

대충 맞추다 보니 내 이름을 읽을 있게 되었다. 신기했다. 글자를 이리저리 굴려서 낱말을 만들어 보았다. 글자는 어찌어찌 깨쳤지만 숫자는 어려웠다. 특히 숫자 팔을 쓰는 게 무지 어려웠다. 선생님이 칠판에 팔자를 쓰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잘 쓸 수가 없어서 눈사람 모양으로 그렸다. 동그라미 위에 동그라미를 얹었다. 남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한글을 못 뗐다. 나도 공부를 못해서 동생을 가르칠 형편이 못되었다. 동생이랑 나는 늘 나머지 공부를 했다.



참음이 한계까지 차올랐는지, 어느 날 밤 엄마의 신세 한탄이 길게 이어졌다. 엄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질렀다. 여태 참고 살았는데 남편은 술태부에다 아들은 한글도 못 떼고, 나머지 공부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눈이 뒤집히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밤새 울부짖고 소리 지르고 손뼉을 쳤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이불 쓰고 누워 밤을 새웠다. 밤새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치던 엄마가 " 어쩌면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 이럴 수 있냐!  가서 청심환이라도 사와!!"라고 울부짖었다. 아버지도, 언니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첫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버스 정류장 앞 에덴 약국에서 청심환을 두 알인가를 샀다. 청심환을 먹고도 엄마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에게 무언가 큰일이 있었을 텐데 가족들이 몰랐던 것이다. 그때는 엄마가 왜 저러나  생각만 했지, 무슨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걸 다 말하지 않는다는 걸, 자식을 키워보니 알게 되었다. 그때 엄마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포악을 부렸다. 동네 아줌마들이 먹을 것을 들고 드나들면 이년, 저년, 하고 이를 갈았다.

평소의 얌전하고 단정한 엄마가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을 무지막지하게 쏟아 냈다. 얼마 후 엄마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거둬들이고 자신을 추슬렀다. 그것은 남동생 때문이었다. 놀란 남동생이 경기를 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남동생도, 엄마도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가뜩이나 소심하고 주눅 들어있던 남동생은 더욱 조용해졌다.



동생이 죽고 한동안 나는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 애를 들볶아서 혼이 나갔고, 결국에는 죽었다고. 엄마가 나를 보는 눈길은 왠지 '네가 왜 살아 있느냐!'라고 힐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살아있는 게 미안했다. 귀한 아들 말고 세명이나 있는 딸 중에 제일 못난 나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엄마는 왜 나를 그런 눈길로 보았던  것일까?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한 눈빛,  나는 죄인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밤낮없이 날뛰고 소리 지르는 동생을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밤새 한잠도 못 자서 눈이 빨개서 학교에 갔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학교에 가면 하루종일 엎드려있었다. 친척아저씨가 소개해준 서울 큰 병원으로 동생을 엄마와 함께 데리고 가서 진찰을 했다. 한 달 치 약만 타서 내려왔다.

입원비가 너무 비쌌다.



엄마는 누군가에게서 천안에 있는 약수터  약수가 용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짐을 꾸렸다.

약수를 받아서 밥도 지어먹고 국도 끓여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온갖 병을 갖은 사람들이 살다시피 하며 생활을 한다고 했다.

쌀자루와 김치가 든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엄마는 동생과 함께 떠났다. 보따리 귀퉁이로 양은 냄비가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감추지 못하는 비루한 삶이었다. 한 달 만인가 검은 저녁에 엄마도 동생도 푸르 죽죽 한 얼굴로 대문으로  들어섰다.


"간밤에 꿈을 꿨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데 웬 애기를 포대기로 업고 있었는데, 어찌나  무겁던지 돌덩이 갔더라! 근데 그 애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더라고,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아마도 네 동생  병이 다 낫으려나 보다!"

동생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엄마는 간밤

꿈 얘기를 했다. 엄마 아들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이주만에 죽었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다. 엄마는 잉걸불속에 타들어가는 관짝을 보며 섦 게 울었다. 눈은 너무 하얳고 화장장 불길은 너무 벌갰다. 나는 이제  고통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장례도 없이 화장해서 뼛가루는 바다에 뿌렸다. 무덤을 쓰면 허구한 날 거기 가서 울고 있을 거라고 바다에 뿌렸다. 아들을 잃은 어미는 목 노아 섦 게 울 아들의 무덤이 있어야 했다. 자식이 죽은 엄마는 죽을 만큼 울어도 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리 식구는 남동생의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습관처럼, 슬픔을 애도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썩어갔다. 동생의 뼛가루를 바닷가에 뿌리고, 나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다음날 공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회사 기숙사로 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온  모습으로. 차마 어루만질 수 없는 슬픔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다만, 시외버스를 타기 전 문방구 옆 빨간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서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동생이 죽었다!"며 조금은 건조하게 말했다. 조금은 울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나는 한동안 밤마다 울었다.

딱히 동생을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베갯잇이 젖도록 울었다. 갈색옷을 입고 통닭이 든 검은 봉지와 누워 있던 모습이 나를 따라다녔다. 엄마는 동생이 죽은 그 자리에서 사십구재를 지냈다. 그렇게 세상 귀한 아들을 보냈다.

열일곱의 아들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엄마는 겨울나무였다. 다음 주말에 내가 집에 가니 엄마는 옷을 한 보따리 내어 주며 태우라고 했다. 동생의 옷이었다. 나는 수로 둑으로 가서

옷을 태우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돌아왔다.

그때 그슬린 검댕은 몸 안으로 스며들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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