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방에 사는 여자 Apr 24. 2024

초록색 책장을 버렸다.

'띠리링'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막 고무장갑을 꼈을때,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경비실인데요, 아까 내놓으신 책장 스티커 안 사셔도 되겠어요! 좀 전에 누가 쓴다고 가져갔어요!""아! 그래요? 잘됐네요!"

한 시간쯤 전에 초록색 책장을 버리면서 누군가 가져갈지 모르니 며칠간 기다렸다가 재활용 스티커를 붙이겠노라고 경비 아저씨께 이야기해 둔 터였다. 사천 원 하는 스티커 값을 아끼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 쓸모가 있어서 책장을 가져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컸다.



둘째와 나이가 비슷한 초록색 책장은 큰아이 다섯 살 무렵부터 우리 집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긴 세월을 함께 하며,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책을 좋아하는 큰 딸이 제  키높이에 맞는 책장에서 맘껏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게 장만한 책장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밝은

초록색의 책장은, 커다란 그림책을 꽂을 수 있고,  작은 책도 꽂을  수 있도록 칸칸이 높낮이가 다르고,  두껍고 튼튼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뒤틀리거나 휘어짐이 없었다. 그 책장을 가장 애정한 것은 큰 아이가 아니라 둘째 딸이었다.



언니가 유치원에 등원을 하고 나면, 둘째는 초록색 책장 앞에 앉아서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골라서 엄마와 함께  한 시간 남짓 읽었다. 언니에게 밀려서 엄마의 관심에서 둘째가 소외되지 않도록 급한 집안일들을 미뤄두고 아이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에는 진하게 탄 블랙커피와 아이가 고른 책과 엄마가 선택한 책들이 있었다.



스티커를 좋아했던 둘째 딸은 마트에 가면 꼭 스티커를 한 가지씩 샀는데, 초록색 책장에 키높이만큼 스티커를 붙이며, 엘리베이터라고 칭하며 놀았다. 스티커 엘리베이터는 해가 갈수록 점점 높아졌고, 어느 날에는 책장 제일 높은 곳까지 스티커가 붙여졌다. 그저 재미있게

노는 것이 최고였던 아이들이 자라나서 더 이상은 스티커를 붙이지 않는 시절에도 우리 집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초록색 책장.



이제 큰딸은 스물한 살의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꿈 많은 대학생이 되었고, 늘 언니 뒤꼭지 쫓아다니던, 둘째 딸은 열여덟, 친구가 소중하고 공부에 지쳐가는 고2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미 자라났는데 엄마인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들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아깝다고, 아직은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이고 지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또 버리고 있는 요즘, 나무도 적당한때 가지치기를 해줘야 더욱 잎이 푸르러지고, 열무도 제때 솎아줘야 햇볕을 골고루 더 잘 받고, 뿌리를 튼튼하게 내려 싱싱한 열무로 성장하는 법이다. 빼곡했던 아이들과 나의  시간들도 버리고, 거리를 둬야 건강한 성인으로 튼실한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림은 비움이고, 비워진 공간에는 새로운 인연의 싹이 자라날 것이다. 예쁜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있는 초록색 책장이 부서지고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공간으로 가서 새로운 쓰임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참으로 고되었지만,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고마웠다고, 그때 그 시절의 에게 편지를 쓴다. 잘 해내었다고, 칭찬 스티커를 꾹 붙여준다.


때로는 추억이 될  때까지 그 순간의 가치를  절대 알지 못한다.

           -닥터 수스-



매거진의 이전글 봄날을 걷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