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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May 29. 2024

 큰 딸의 노선도

대학 입학을 앞두고 딸은 학교까지 가는 길을 여러 경로로 탐색했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해 가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는 많이 달랐다. 버스로만 이동할지, 지하철만 이용할지,

버스와 지하철을  모두 이용할지, 버스를 이용한다면 어디에서 내려서 몇 번 버스로

환승할지, 지하철을 탄다면 몇 호선을 타고 어디에서 몇 호선으로 갈아탈지. 단순하지만 나름 치밀한 전략이 필요했다. 갈아타는 역의 혼잡함이나 소요되는 시간이나 수고로움은

노선도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돗떼기 시장 같은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했던 경험을 되살려 혼잡함과 환승역에서 갈아타는 데 걸리는 시간과 난이도등을 고려하여 제일 적당한 노선을 제안했다. 딸은 내 제안을 못 믿겠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버스로만 이용하는 길을 택했다. 버스나 지하철이나 한 번에 갈 수는 없고 두 번은 갈아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 동네에서 타면 버스는 앉아 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버스 차고지에서 세정거장째이기 때문에 좌석이 대부분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출발 후 몇 정류장이 지나면 좌석은 꽉 차고 나중 타는 사람은 서서 가는 경우도 많다.  버스는 도로의  사정에 따라 예정 시간보다 더 늦게 도착할 수 있으며, 멀미를 하는 딸에게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러니까 왕복 5시간을 버스로만 통학한다는 것은 무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일단 몸소

경험을 해보아야 납득을 하는 딸이기에 나는 딸의 결정을 존중했다.



첫날은 학교까지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 딸을 위해 함께 가기로 했다. 함께 갔다가 내 볼일을 보고 끝나는 시간에 만나서 같이 오기로

했다. 아이에게는 내 볼일을 본다고 했으나 나는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입학 행사를 마치고 만난 아이는 돌아갈 때는 엄마가 말한 노선으로 가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한 지하철 노선대로 가보기로 하였고, 딸은 엄마가 알려준 방법이 더 낫겠다며  그 노선으로 등하교를 하겠다고 했다.



큰딸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걸어서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건널목을 한 번도 건너지 않아도 되었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 몇 걸음 떼면 학교 교문이었다.

중학교는 널목을 하나 건너서 갔다.

고등학교는 인근 도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하여서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니 통학 거리는 가깝다고 할  있겠다. 큰딸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 앞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선택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노선 변경을 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 선로위에는 무수한 고뇌와 불안이 침전되어 있었으나, 한발 내딛는 것에는 담대한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집 앞의 고등학교에 자리가 있어서 전학을 올 수 있었다.




도착지와 출발지 간에는 수많은 역들이 있다.

큰딸은 어떤 날은 화장실이 급해서 내렸다가 볼일을 본 후 다시 타기도 했고, 오랜 시간 전철을 타면서 만나는 다양한 행태의 빌런들에 대하여 토로하기 바빴다. 내리기도 전에 확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내려야 할 역에서 미처 내리지 못할 뻔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체구도 작은아이가 사람들 틈에 치어서 혹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한동안은 걱정이 맘속에서 일어나곤 하였으나, 그런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매너 좋은 사람들도 많아서 손잡이를 잡고 잘 설 수 있게 살짝 옆으로 이동하거나 가방에 옆사람이 부딪칠까 가방을 내려서 손으로 들거나, 살짝 발이 밟혀도 막무가내로 째려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였다. 졸다가 옆사람 어깨를 툭 치면 기분 나쁜 듯 툭 털어 내는 사람도 있고,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가 주로 전철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환경이 많이 바뀐 것이었다. 새로운 노선들이 다양하게 생겨났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한두 가지의 길 밖에 없던 시절에 비하면 세상은 더욱 넓어지고 다양한 길들이 생겨났다. 어제만 해도 딸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새로운 길로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는데, 한참 지나서 딸에게서 톡이 왔다. 방향을 잘못 타고 잠이 들어서 반대 방향으로 한참 갔다고.

올라가야 하는데 내려간 것이었다. 다행히 내려서 바로 갈아탈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나의 노선도는 나의 경험치만큼의 한계가 있다.

 딸은 좌충우돌하면서 새로운 노선도를 그려나가는 중이다. 내가 가보지 못할 곳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할 시간에서 딸은  우산도 잃어버릴 것이고 인파에 떠밀려서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딸이 타고 있는 지하철의 어디쯤에 타고 있는 걸까? 어린 시절처럼 아직도 옆자리에 붙어 앉아 있는 걸까? 아마도 딸은 건너편으로 옮겨 앉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비로소 엄마의 모습을 마주 바라 보고, 뒤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고 있다. 엄마 눈밑의 주름도 더 잘 보일 테고, 얼굴의 잡티나 점들도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딸은 다른 칸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딸에게 그만한 명징함이 생길 때까지 무던하게  앉아 있어야겠다. 환승역에서 딸은 다른 호선으로 갈아탈 것이고, 나는 나의 환승역으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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