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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말로 Nov 05. 2024

중국 생활, 불안 속에서의 아련한 추억

그곳에서도 아련한 추억은 존재했다

중국에서 수업일과 휴일은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은 평일 5일 수업에 주말 이틀 휴일이라고 하면 중국은 대강 9일에서 10일 정도 수업을 듣고 2박 3일에서 길면 4박 5일 정도 휴일을 가졌다. 우리는 그 휴일을 휴가라고 불렀다. 워낙 그 지역의 땅덩어리도 넓다 보니 본가가 먼 중국 학생들이 많았다. 수업일에 다들 학교 숙소에서 지내다가 휴일이 되면 다시 본가로 가는 학생들이 많았어서 휴가 기간이 시작될 때마다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님 차량 행렬이 줄을 지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도 한국이랑 확연하게 달랐는데 중국 학교는 아침 7시 정도에 일어나서 4교시 수업을 듣고, 오후 12시 정도에 점심을 먹고 각자 숙소로 가서 2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휴식을 한 후에 오후 2시 반쯤에 수업을 3교시 정도 들은 다음, 저녁 6시쯤에 밥을 먹고 잠깐 숙소로 가서 저녁 수업을 준비 한 뒤, 7시에서 9시까지 남은 수업을 듣는 하루 루틴이었다. 숙소에서는 아침 모닝콜로 소녀시대 훗을 틀어주었는데 약간 국뽕을 잠깐 느꼈지만 아침마다 그 노래를 들으니 노이로제가 걸릴 뻔했다. 낮잠 시간과 저녁 취침시간에는 색소폰의 전설 케니지의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 노래는 내 취향 저격이었던 노래들이라 매번 흘러나올 때마다 좋아했다.


휴가 기간에는 저녁 6시 정도까지는 밖에 놀다 올 수 있었는데 문제는 학교 근방이었을 뿐이지 더 먼 곳은 갈 수가 없었다. 멀어도 차로 10분 정도 되는 거리까지만 갈 수 있었다. 원장 선생님이 고용하신 탕쓰지 ( 성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 ” 司机“직역하면 탕 기사님이 계셨는데 항상 휴가가 시작되거나 이럴 때 원장 선생님 차로 우리를 학교 밖으로 데려다주셨다. 기사님이 데려다주시기도 했지만 그때는 마개조 된 전기 자전거를 통해 손님을 태우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5위안 ( 당시 가격 800원 )만 주면 학교 근방은 전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조금 멀다 싶으면 10위안만 ( 당시 1600원 ) 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기사님 차를 안 탄다 싶을 때는 그 자전거를 매번 타고 다녔다. 그 아저씨들도 휴가 기간만 되면 줄지어서 손님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학교 근방을 좀 가면 만쟈푸라는 조그마한 복합 쇼핑몰이 있었는데 나름 그 시내에는  피시방도 있었고 kfc나 한국 음식점도 있었다. 그때 중국은 실내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던 곳이 많았기에 피시방은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고, 옆자리에 담배 피우는 아저씨가 앉는 순간 고역이었다.  중국에서 피시방을 이용하려면 여권을 이용해야 했는데 사실 미성년자였어서 이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피시방 쪽에서 다른 중국인 신분증으로 아이디를 만들어 주어서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햄버거도 먹을 일이 별로 없었기에 학식이 질릴 때쯤에 kfc만 가면 잠깐의 천국을 경험한 듯 들떠 있었다. 한국 음식점은 그다지 별로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송가네라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한식점이 생긴 후로 한식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휴가 기간마다 사무실로 가서 원장 선생님에게 용돈을 받아서 썼다. 부모님들이 한 달에 한 번 보낸 용돈을 원장님이 따로 쪼개서 휴가 기간마다 일정 금액으로 주셨는데 금액의 최대치가 대강 500위안 까지는 되었어서 마음대로 휴가 기간 내내 쓸 돈을 정해야 했다. 학식도 그렇고 주변 식당들도 전부 가격이 싼 편이었기에 500위안도 휴가 기간 내내 다 쓰지 못할 금액이었다.


맨 처음 한국부는 학교 정문 쪽이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호텔 쪽 건물이었다. 한국부는 원장 선생님과 그 옆에 계신 최라오스 “ 崔老师 ” 한국어로 직역하면 최 선생님이 관리하셨다. 최 선생님은 당시 연세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 거의 우리 유학생들한테는 어머니 같은 존재셨다. 조선족이셨는데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에러시아어까지 능통하셨다. 중국에서 생활하려면 현지 경찰서에서 매년 비자 유형을 바꾸고 주숙 등기라는 것을 해야 했는데 최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끌고 그 부분들을 전부 처리해 주셨다. 우리 중 한 명이 사고라도 치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셨고,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최 선생님은 직접 학교 교장실로 찾아가서 항의도 하셨다. 조금은 학교 내에서 입김이 센 곳이 한국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거의 10위권 내의 대학교 입학생들을 배출하는 곳이 한국부였고, 우리 한국 유학생들 대부분은 3위, 4위권은 기본으로 갔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우리를 조금 관대하게 대해준 듯했다. 신입생들 교육은 거의 최 선생님께서 도맡아 하셨다. 나도 처음 중국어를 최 선생님한테 배울 수 있었다. 단어도 빡세게 외워야 했다. 신입생 반을 한 달 정도 듣고 바로 중국인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 합반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기초 중국어는 재빨리 배워야 했다.


나도 한 달 정도 기초 중국어 수업을 듣고 합반으로 이동했는데 중국 친구들로 둘러싸인 교실 칠판 앞에 서서 내 이름을 중국어로 쓰고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안경을 쓰고 우기명 머리 스타일의 전형적인 중학교 1학년의 모습으로 새로 산 가방을 어깨에 메단 채 말이다. 중국 친구들이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박수를 쳐주었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첫 수업을 들었다. 아무 말도 잘 안 통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다. 쉬는 시간 10분마다 나와서 바깥바람을 쐬었는데 그래도 중국 친구 몇 명이 와서 말을 걸어주고 나는 어설픈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


교실에서 듣는 수업들은 전부 당연히 중국어로 들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냥 못 알아들어도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느 날에는 담임 선생님이 영어 수업 때 나를 가리켜 영어를 읽게 시키셨는데 영어는 다행히 만국 공통어라 그런지 영어가 당시에는 중국어보다는 편해서 영어 수업은 대강 들을 수는 있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카카오톡으로 치면 위쳇이 유행하기 전이라 다른 메신저가 인기가 많았다. QQ라는 메신저 어플이었는데 중국 친구들이랑 그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하면서 대화를 조금이 나마 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 폰을 보면 약간 이상하게 개조된 폰들이 많았는데 싼값에 쓰는 핸드폰들이었나 본 지, 앞 면은 삼성인데 뒷면은 중국 제조사인 이상한 핸드폰들을 쓰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나의 베가레이서는 얼마 안 가 중국 유심이랑 호환이 안돼서 아버지한테 다시 부탁해서 삼성폰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중국에서 카카오톡도 잘 됐었다. 지금은 쓰지 못하지만 구글 플레이 같은 구글 관련된 어플들을 잘 쓸 수 있던 때라서 유행하던 모두의 마블이나 쿠키런 같은 카카오 게임들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정도 지나니깐 중국정부에서 구글 관련된 어플들을 막기 시작했다. 지금은 카카오톡, 네이버까지 막힌 걸로 아는데 그나마 카카오톡, 네이버는 당시까지만 해도 자유롭게는 쓸 수 있었다.


학교 주변 식당 음식이나 학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흑백 요리사에서 안성재 셰프님이 급식대가님 요리를 먹고 추억을 엄청 떠올리셨듯이 정말 나도 그곳에 다시 가서 먹고 싶을 정도이다. 당연히 중국 학교였다 보니 중국음식들만 있었지만 내 입맛에는 너무나도 잘 맞았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학식 메뉴가 있다. 그 메뉴는 돼지고기와 고추가 잘 볶아져 나온 정말 누구나 좋아할 맛의 음식이었다. 라쟈오 “ 辣椒 ” 한국어로 직역하면 고추인데 단순히 편하게 부르려고 다들 라쟈오라고 불렀다. 학교 정문을 나가면 다양한 길거리 식당들이 많았는데 가격도 정말 쌌다. 볶음밥 하나에 3위안 당시 가격으로 3-400원 정도였고 맛도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그리고 졸업한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말하는 그리운 음식이 창펀 “ 肠粉 ”이라는 음식인데 계란과 밀가루를 두르고 살짝 익힌 다음 그 위에 중국식 간장 소스를 뿌린 담백한 음식이었다. 정말 중국 어느 곳을 가도 한국에 와도 그 담백한 맛을 제대로 구현하는 곳을 못 볼 정도로 그곳의 창펀은 정말로 맛있었다. 하물며 마라탕마저 나는 한국에서 잘 먹지 않는다. 정말 그곳의 마라탕 맛이 정말 안 잊혀져서 그런지 죄다 거기서 거기인 느낌이다.


한국 음식이 많이 그리울 때면 부모님한테 부탁해서 김치나 한국과자 등등 여러 가지 음식들을 택배로 보내달라 할 수밖에 없었다. 유학 초반에는 근처에 한국 관련된 물품들이나 음식들을 파는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항상 늘 다들 한국에서 오는 택배만을 기다렸다.


동관은 남부 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었어서 여름에는 엄청 더웠다. 겨울은 한국보다는 버틸만한 정도였다. 그곳은 벚꽃을 못 보는 지역이라 한국에서 매년 벚꽃축제한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무척이나 벚꽃을 보고 싶었다. 나는 벚꽃을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를 중간에 마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여름에는 엄청 고욕이었던 게 벌레가 들끓었다. 바퀴벌레는 약과이고 비벌레라는 곤충이 정말 여름마다 매번 우리를 괴롭혔다. 방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서 러브 버그 마냥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안 했다. 방문을 살짝 열어 놓으면 바로 그 틈을 타고 들어와서 침대, 옷장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한 번은 방 창문에 수십 마리가 붙어있길래 어떤 형이 에프킬라랑 라이터를 들고 거의 화염방사기를 시전 하여 불을 뿜어댔는데 불에 타서 죽는 비벌레들 광경을 보면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한 학기 정도 신입생 형과 단둘이 지내다가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와서 유학하고 있던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가 있는 방으로 옮겼다. ( 그 친구가 시간 지나서 말하길 자기도 동갑내기가 정말 그리웠다고. ) 당시에 그 방은 유학생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형, 중간에 나보다 두 살 많은 형 그리고 그 친구 세 명이서 쓰고 있었는데 내가 워낙 친구가 고프고 그랬던걸 원장님한테 어필을 하니 방을 옮겨주셨다. 네 명이서는 비좁긴 했지만 2층 침대가 따닥 붙어서 잠은 잘 잘 수는 있었다. 그중에 제일 큰형이 요리를 정말 잘하는 형이었어서 우리 유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유명했다. 휴가 기간만 되면 된장찌개나 고추장찌개, 김치찌개 같은 음식을 해주었는데 항상 같은 방 우리 세명만이 그 음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형들도 우리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난리였다. 숙소에는 밥솥이 없어서 학교 정문 쪽 근처 식당에서 음료수나 밥을 포장해 올 수 있었는데 숙소에서부터 걸어서 대강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휴가 기간마다 먹을 수 있는 큰형이 해주는 특식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나와 중간형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는 매번 음료수 큰 거랑 공깃밥을 주섬주섬 들고 왔다 갔다 했었다. 방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서 그런지 개인 프라이버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들끼리 부디 끼며 좀 재미나게 생활했던 공간이었다.


학교를 다닌 지 1년쯤 되었나 매번 한국 가고 싶다고 난리를 쳤다 보니 부모님이 걱정이 되셨는지는 몰라도 동생이랑 같이 한 번 학교로 오셨었다. 3박 4일 정도 왔다 가셨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체육 대회가 하루 남은 시점이었던 거 같다. 그때는 누구 부모님이 오시면 원장님이 한국부 뒤에 학교가 운영하던 호텔에 방을 잡아 주셔서 숙소를 며칠 벗어나서 그곳에서 가족과 같이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골프를 좋아하시는 부모님들은 항상 원장님이랑 근처 필드가 어마어마한 골프장을 가시곤 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골프에 관심이 없으셔서 학교 근처 탐방을 하거나 조금 멀리 떨어진 대형 쇼핑몰을 가셨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숙소에는 청소기 하나 없어서 매번 빗자루나 걸레로 여러 번 청소를 해야 했는데 확실히 여러 번 그렇게 청소를 해도 먼지를 다 잡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오시자마자 우리 방에 청소기를 사다 주셨는데 당시 우리 유학생들한테는 가뭄에 단비 같은 물건이었다. 점심에는 나, 우리 부모님이랑 큰형이랑 작은 형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랑 따로 밥을 먹으면서 중국 생활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오후쯤에 한국부 뒤뜰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였는데 그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한국부에는 탁구대랑 당구대가 있는 공간이랑 사양은 그리 좋지 않은 컴퓨터 실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서 형들이랑 친구, 동생들이랑 별의별 거를 하면서 즐겼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계시던 중간에 한국부 체육대회가 열렸다. 매년 한 번씩 열리던 체육 대회였다. 당시 이긴 팀 상품이 샴푸나 세제 같은 실생활에 유용하게 쓸만한 물건들로 가득했었다. 형들은 정말 매번 승부욕이 넘쳤다. 나는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서 축구에서 수비수를 했었다. 그나마 달리기에는 자신 있었는데 나보다 더 잘 뛰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눅이 들었다. 나랑 동생은 6살 차이인데 당시에 동생이 엄청 어렸어서 누나들이 참 잘 챙겨줬었다. 지금은 성인이 된 동생이 아직도 기억할 정도니 말이다. 수비수로 참가했던 축구시합을 시작하고 얼마 안 가 경기 중간에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형이 찬 공에 얼굴을 직방으로 맞고 아파서 그 자리에서 엄청 울었다. 안경도 반 토막이 나서 눈도 잘 안 보였다. 부모님이 봤을 땐 저기서 울고 있는 아들 보며 무슨 생각하셨을지 참 궁금하기도 하다.


결국에는 내가 속한 팀이 이겼는지 누가 이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뭐 매번 체육대회마다 열심히는 했던 거 같다. 부모님과의 3박 4일이 지나고 다시 일상( ? )으로 돌아왔다. 청소기가 생기니깐 여러 형들이 우리 방에 와서 청소기를 자주 빌려 가곤 했다. 참 구세주 느낌이 가득한 청소기였다.


시간이 좀 지나서 제일 윗 형들의 졸업식이 다가왔다. 같이 생활하던 제일 큰형이 졸업을 하였고, 두 번째 형이 서열 2위 정도 되는 학년으로 올라갔고, 우리는 여전히 막내 서열이었다. 당시에 단순히 한 살 차이 한 학년 차이가 주는 중압감이 어마어마했다. 형들에게 항상 깍듯해야 했다. 물론 친구처럼 대해주는 형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누가 부르면 무조건 바로 뛰어가서 잡일을 해야 했다. 형들이 먹은 음식을 설거지한다든지 아니면 장난을 받아준다든지 말이다. 장난이 좀 극심할 때도 있었다. 드라마 DP에서 나온 몇몇 부조리 장면들은 여기서는 거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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