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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말로 Nov 01. 2024

첫 중국 유학, 불안 증폭의 시작

2012년 8월 28일 그날이 불안의 불씨를 지폈다.

2012년 8월 28일, 처음 중국을 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중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9월부터 첫 학기의 시작이어서 8월에 처음 중국을 가게 됐다. 당시 아메리칸드림을 이을 차이니스 드림이라고 해야 하나 ( 물론 내가 애써 지어낸 말이지만 ) 중국이 성공의 땅이라는 인식이 많이 피어오를 때라 부모님도 그걸 인식을 하신 듯 중국 학교에서 한국부를 운영하시는 원장님이랑 친분이 있어서 그분이랑 상의를 하신 다음 나를 중국에 보내기로 마음먹으셨다. 부모님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라 아버지는 중국 사업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 중국을 많이 왔다 갔다 하셨다. 나중에 아들이 사업을 도와주었으면 해서 보낸 측면도 있으신 거 같다. 중국을 가기 전에 나는 아버지한테 핸드폰을 최신 스마트폰으로 바꿔주면 바로 가겠다고 하여 아버지는 핸드폰을 바로 바꿔주셨다. 핸드폰도 당시에는 갤럭시 노트 1이 최신폰으로 나왔던 시기였는데 나는 베가 LTE-A로 골랐었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6개월 반학기만 다니고 떠나야 했는데 아직도 그곳 중학교 기억이 중국에서의 기억과 맞먹을 정도로 선명하다. 답답했던 초등학교를 떠나서 새로운 친구들과 워낙 잘 어울려 지냈던 곳이었기에 중국을 가야 한다는 것이 매우 서글펐다.


중학교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3주 뒤쯤에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중국에서 유학을 먼저 하고 있던 형들과 누나들 원장 선생님이 계셨다. 나와 같은 신입생 형들 세명도 같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그 사람들과 난생처음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나라였기에 엄청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떠나는 거라 더욱 떨렸다. 3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 심천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 정말로 한국을 벗어나서 진정 중국에 발을 내딛는구나 싶었다.


학교는 동관이라는 인구 1억 명의 도시에 위치에 있었다. 홍콩이랑은 기차 타고 3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대도시였다. 심천 공항에서 학교까지 1시간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공항을 빠져나오고 약간 마을버스 크기 정도의 버스가 있었는데  모두 그곳에 짐을 싣고 학교로 출발했다. 이미 이곳에서 유학을 전부터 하던 형들은 익숙하듯이 버스 안에서 노래를 틀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서로 주고받았다. 나를 포함 신입생 형들은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런지 가만히 1시간 동안 묵묵히 침묵을 유지한 채 버스 안에서 바깥 풍경만을 바라봤다.


학교 주변에 다다랐을 때 조금은 놀랐다. 지방 읍내 느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학교는 엄청 크고 웅장했다. 빈부격차가 정말 심한 나라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짐을 다 같이 들고 숙소로 향했다. 학교 내부에 5층짜리 건물의 숙소가 9채 정도 있었다. 이 정도면 학교 크기를 확실히 체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자 숙소, 남자 숙소 나누어져 있었다. 그곳에 유학생들은 우리 한국인들 밖에 없었는데 5층짜리 숙소에 마지막 층 전부는 우리들이 썼었고, 나머지 1, 2, 3, 4 층은 중국 학생들이 생활했었다. 숙소 방 크기는 원룸 정도였는데 그 작은방에 네 명 정도까지는 간신히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두 명 정도면 넉넉한 수준의 크기이긴 했다. 옷장 하나에 책상 두 개, 침대가 두구 있었다. 화장실은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보면 나오는 그런 조금은 허름한 화장실이었다. 기존에 같이 쓰던 형들은 각자 방으로 가서 짐을 풀었고, 신입생인 나는 새로 온 형이랑 둘이 같이 한 방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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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이 신입생이냐면서 우리 방으로 찾아왔고, 이름이 뭐냐, 어디서 사냐 등도 물어봤다. 좀 우쭐해서 간신히 대답을 했었다. 방에 세탁기가 있었는데 혼자 직접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해야 했던 곳이라 중1 때부터 생활습관을 제대로 기를 수 있었다. 빨래는 항상 엄마가 해주었던 것인데 이제는 혼자서 빨래를 해야 해서 세탁기 작동법을 잘 몰랐었다. 솔직히 그 나이에는 잘 알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조금 어리둥절하며 서있었는데 어떤 형이 와서 세탁기 작동법을 알려주었고 다행히 첫 빨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첫날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숨어서 부모님한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견디라는 말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서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에 막막했다. 첫날부터 내 고향 한국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이틀 정도 지나고 중국 유심칩을 만들 수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개인 정보 엄청 빼낼 거 같은

싸구려 유심칩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전용 국제전화번호가 있었는데 ( 001, 00700 이런 전화번호는 아니었다. ) 그나마 무료로 쓸 수 있어서 한국에 전화하기엔 편했다. 데이터도 평소에는 몇 백 메가바이트 밖에 안 돼서 정말 소중하게 데이터를 써야 했다. 그나마 일정 요금 더 내면 오후 10시부터 5기가 정도를 쓸 수 있었다. 원장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웃기게도 그 숙소에 와이파이 공유기 하나도 달아주지 않았었다.


이곳에는 나름 정해진 다양한 룰들이 많았다. 중국어로 “ 新来的 xin lai de “ 직역하면 " 새로 온"인데 신입생들이 오면 항상 신라이더라고 불렀다. 나름 전통이라고 하는데 그건 뭐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생일빵이라는 룰도 있었는데 생일이 되는 사람을 세우고 멀리서 누가 케이크를 들고 뛰어오면서 얼굴에 그대로 직방으로 내리꽂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전 학년이 모여서 전부 생일인 상대방을 세워두고 그 사람의 팔을 각 한 대씩 때리는 방식으로 변했다. 장기자랑도 있었는데 신입생들은 새로 오면 노래 하나씩 준비해서 형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나는 당시에 임재범 너를 위해를 불렀는데 참 다시 생각해 보면 웃프기도 하다.


9월 18일 중국에서 첫 생일을 보냈을 때 나도 얼굴에 직방으로 케이크를 얻어맞았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조심한 성격인 나는 정말 첫 학기를 적응하려 애썼다. 아니 그냥 몇 개월 뒤에 시작하는 겨울 방학만을 그리워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가서 한국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한테 영향을 주는 나의 불안의 불씨를 지펴버린 중고등학교 5년의 시작을 알리는 2012년 8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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