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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말로 Oct 29. 2024

불안의 시발점

나의 불안이 발현하게 된 첫 시기

엄청 어렸을 때부터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 탓인지 친구들과 많이 어울려 지내지는 못했다.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부모님이 좀 고생하시면서 보냈던 곳이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전부 같은 곳을 다녔다. 의기소침한 성격 탓인지 적응하려 애썼던 곳이 초등학교였다. 대부분 상류층, 중산층 집안의 자제들이 다녔던 곳이라 그 분위기에 나도 흡수되고 싶다는 생각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과 어떻게 해서든 잘 어울려 지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다른 친구가 뱉은 침도 맞아보고..

집안 수준에 따라 물질적으로 사람의 계급이 나뉜다는 느낌을 어린 나이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열등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필기구부터 해서 운동화, 장난감,

게임기, 핸드폰까지 거의 그 당시에 초등학생들이 쓰기에는 버거운 가격의 물건들이었기에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바라보며 초라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5만 원짜리 샤프, 유행하던 최신 리복 운동화, 일본산 포켓몬 피규어, 닌텐도, 그리고 최신 스마트폰들을 입고 쓰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정말 더 심하게 의기소침해지는 듯했다.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투정 부리기도 애매해서 가지고 싶어도 그냥 친구들 물건을 내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당시 핸드폰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2G 폰의 시대가 점점 끝나가고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시절, 당시에 우리 아빠도 간신히 장만한 갤럭시 s1을 초등학생인 옆 친구가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데 얼마나 느낌이 이상하던지. 핸드폰은 아침에 선생님한테 제출하고 수업이 다 끝나면 가져갈 수 있었다. 반납 가방에는 스마트폰들이 수두룩한데 달랑 몇 개 남은 2G 폰 중에 하나가 내 핸드폰이었다. 당시 내 폰은 코비 F라는 검은색 폴더폰이었는데 한 친구가 내 핸드폰을 보고서는 바퀴벌레 같다고 했던 그 말과 장면이 20대 중반이 지난 나이인 지금에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수학여행을 갔을 때도 다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나만 폴더폰으로 게임을 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베가레이서라는 스마트폰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엄마한테 엄청 졸라서 사게 된 스마트폰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나서는 다른 친구들이 무슨 얘가 스마트폰으로 바꿨지라며

조금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나를 놀렸었다.


등하교할 때도 나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 학교는 등하교를 할 때 스쿨버스도 있었지만 자가용을 끌고 데려다주는 부모님들이 많으셨다. 그중에서 나도 포함이었다. 당시 우리 아버지 차가 스타렉스였는데 사업 초창기 시절이라 스타렉스에 회사 로고 스티커와 전화번호가 빽빽이 붙여져 있었다. 그게 난 너무 쪽팔렸다. 앞뒤에는 고급 진 외제차가 수두룩했는데 그 사이에 낀 내가 정말 초라했었다. 부모님이 화장품 영업을 뛰시다가 사업을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었을 당시에 우리 가족은 조그마한 옥탑방에서 살았었다.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살았는데 음식을 만드는 주방에서 샤워를 해야 했었고, 방도 작아서 동생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비좁게 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일 때는 친구들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 옥탑방 생활들이 나에겐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6학년 막바지에 부모님의 사업이 어느 정도 잘 돼가기 시작했을 무렵에 아버지가 아우디로 차를 바꾸셨고 그 차를 타고 나를 등교 때마다 데려다주시는데 나름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무시 못하겠지라는 생각과 같이.


부모님이 나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던 이유가 그곳에서 많은 상류층 아이들과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보냈다고 하시는데 나름 그곳에서 배워온 경험 중에 아직까지도 도움을 주는 몇몇 부분들이 있다.

( 스키, 스케이트, 플루트, 바이올린 등등 )

다른 일반 초등학교에서와 다르게 예체능 쪽으로 다양한 스포츠를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매년 겨울에 스키캠프를 보내줬었고, 1년마다 몇 번씩 전 학년이 고려대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었다. ( 스키와 스케이트 저 두 스포츠들은 아직도 몸에 배어 있어서 성인이 되고 몇 년이 지나도 재밌게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다. 심지어 올림픽도 동계 올림픽을 더 좋아한다. ) 음악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악기를 배울 수 있었는데 나는 악기에 소질이 없어서 다른 아이들은 잘만 하는데 나만 따라가지를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과 악기 이야기를 나눌 때 확실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다.

나를 왜 저 학교에 보냈는지 내가 정말 그곳에서 얻어온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열등감 덩어리였고, 친구에 대한 결핍이 상당했었고,

그곳에서 항상 외롭게 지냈다는 느낌만 있었기에 분노만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나는 부모님의 대한 존경심만이 가득하다. 아들이 많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고생하며 보냈던 학교였기에 고마우면서 원망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기도 하다.


지금부터 쓰게 될 나의 불안 이야기들을 다루기에 앞서 나의 불안을 키우게 된 원인이 발현하게 된 시작점은 언제부터인가에 대해 놓고 보자면 초등학교였다고 생각이 들어 시작점을 이 시절로 정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내 인생에 있어서 좋지 못한 임팩트를 남긴 나의 불안을 증폭시켜버린 중국 유학 시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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