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대만 영화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였다. 10년 전 그 시절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좋아했던 영화였다. 당시에 봤었을 땐 첫사랑에 관한 감정에 대해 모르고 봤으니, 단지 흔한 로맨스 영화 보는 느낌만 가득했다. 저 영화를 보면서 상상도 많이 했었다. 나도 저 영화 남주처럼 시간이 지나 학창 시절 첫사랑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상상 말이다.
하지만 10년 뒤, 내가 그 흔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위진이 결혼한다더라.”
내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위진이가 결혼?
그 말을 듣고 애써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벌써?”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정말로 영화 속 이야기가 나의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깐 말이다. “뭐, 위진이 집 돈 많잖아” 하고 미련 가득해 보이는 말투로 답장을 했다. 하긴 걔는 돈 많아서 결혼해도 잘 먹고 잘 살겠지 하고….
위진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위진이는 중국인이었다. 나는 당시 나에게 결혼 소식을 알려준 베프와 같은 반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 그 친구의 이름은 우민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우리는 중국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우민이는 나와 같은 숙소를 쓰며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다. 나와 그 친구는 중국에서의 적응이 쉽지 않아서 늘 같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같이 놀기 바빴다. 그랬으니 중국어도 그리 많이 늘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중국 친구들이랑 안 어울리고, 따로 나와서 우리만의 아지트에 가서 놀기 바빴다. 좀 그러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같은 반에 한 중국 여자애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와 동떨어져있는 자리였는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미모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런 애가 우리 반에 있었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첫눈에 반한 감정을 그때 처음 느꼈다.
다른 반에서도 인기가 많은지 위진이에게 대시를 하러 오는 남학생들이 많았다. 위진이는 항상 그 대시를 질려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었다. 잘생긴 남학생들 대시도 여럿 거절을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애초에 나는 다가갈 생각조차를 못했었다. 한국 학교와는 문화가 달랐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쉬는 시간에 여러 팝송과 한국 노래를 틀어주었다. 당시에 한류의 인기가 무르익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행했던 빅뱅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위진이도 가끔 그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왠지 다가갈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 “그래, 한국 문화로 밀고 나가자!”라고 말이다.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우민이와 나는 위진이에 관한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쪽지를 건네볼까? 아니다. 남자답게 밀고 가?"이러고 일주일 동안 고민한 끝에 쪽지를 주기로 마음먹고, 쉬는 시간에 위진이가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 보는 앞에서 위진이 자리에 대놓고 중국의 카카오톡인 위쳇 아이디와 몇 마디 말을 적은 쪽지를 슬며시 놓고 도망가듯이 반을 뛰쳐나왔다. 옆에 앉아있던 우민이는 어리둥절해하며 반에 있었다. 내가 뛰쳐나갈 때 반 애들이 "오, 위진이 한국 애한테 쪽지 받았네!!"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나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아지트에 숨어있다가 반으로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위진이가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 보더니 자신이 적은 쪽지를 애들이 보는 앞에서 주면서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위진이의 쪽지에는 자신의 위쳇 아이디가 적혀있었다. "설마 나 성공한 거야?"라는 크나큰 성취감을 느꼈고 그날은 정말 내 고등학교 인생 최고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 학교가 끝나고 숙소로 가는 길에 위쳇에 아이디를 검색하고 바로 연락을 했다. "고마워, 쪽지 받아주어서."라는 말을 하니 자기도 당시 상황을 말해주면서 대놓고 애들 앞에서 쪽지 주고 튈 줄은 몰랐다고 했다.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을 시작으로 "썸"이라는 걸 타보기 시작했다. 중간에 자리 배치가 한번 바뀌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 앞자리에 위진이가 와있었다. 우민이도 나랑 위진이랑 연락한 이후로 같이 친해져서 서로 지우개 가루도 날리고 놀기에 바빴다. 어느 날, 내가 만화책을 몰래 보고 있으면 위진이가 빼앗아서 자기가 보고는 했다. 만화책 대사들이 한국어여서 내가 일일이 번역해 줘야 했다.나와 위진이는 항상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했다. 같이 학식도 먹고, 장난도 치며 어떨 땐 나에게 "나중에 한국 가면 가이드 해줄 거야?"라는 말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감기를 심하게 걸려서 학교를 못 간 날에는 위진이가 우민이한테 부탁해서 자기가 직접 산 죽을 전해 달라 하기도 했었다. 그 죽이 정말 맛있었다. 위진이는 그때 내가 언제 학교를 다시 오는지 우민이에게 계속 물어봤었다고 한다. 훗날 우민이는 그때 정말 자기 귀찮게 했었다고 털어놓았다.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내 책상 서랍에 뭐가 들어있길래 봤더니 오리 캐릭터 모양의 카드 지갑이 들어있었다. 감기에 걸려서 숙소에 몸 져 누워있을 당시에 위진이랑 연락을 했는데 자기가 쇼핑몰 왔다고 사진을 보내주면서 나에게 오리 캐릭터 가방과 지갑둘 중 하나 골라보라 했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갑을 골랐었다. 근데 그게 내 선물일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걸 받고 거의 매일 목에 걸고 다녔다.
위진이는 홍콩에 살다가 아버지가 중국 쪽에 사업을 하시기에 학교를 옮긴 아이였다. 광둥어, 중국어, 영어 삼 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 얼굴도 이쁜데 언어까지 능통하니, 이보다 완벽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휴가 기간에 위진이가 연락 와서 "나, 너, 우민이, 내 친구 이렇게 4명이서 같이 놀래?"라고 연락이 왔다.
( 주말, 평일 개념 없이 중국은 9~10일 정도 수업을 듣고 약 3박 4일에서 4박 5일 정도의 휴가 기간을 갖는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하고 뛰쳐나갔고, 그 후에 대형 쇼핑몰에서 네 명이 같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위진이에게 받은 오리 캐릭터 지갑에 대해 보답하기 위해서 같이 놀 때 은근슬쩍 여러 옷 매장도 보고, 소품 숍을 살펴봤다. 소품 숍 하나를 발견하고 위진이가 없는 틈을 타서 선물을 산 다음, 등교 날에 그 선물을 주기 위해 그날 하루 종일 옷 안에 감추고 숙소로 돌아왔다. 등교 날이 되고 나는 한 시간 일찍 학교에 와서 위진이 책상 서랍에 선물을 놓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돌아오니 친구들이 등교를 마친 상태였고, 위진이는 선물을 보고 "이거 네가 산 거야?"라며 웃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해주었다. 행복했던 그 1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중국은 9월부터 1학기의 시작이라 한국과는 다르다. 방학이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위진이는 홍콩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연락을 자주 했다. 영상통화도 하면서 하루하루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6개월이 지난 그때까지도 썸만 타고 있던 상황이었다. 내가 고백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학교로 돌아왔다.오래간만에 눈으로 직접 보는 위진이라 너무 반가웠다. 역시 직접 눈으로 보니 더욱 행복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위진이가 방학기간 동안에 자기가 사놓은 게 있다면서 나와 우민이에게 선물을 주었다. 다름 아닌 오르골이었다. 소리도 맑고 좋았다. 받고 있는 와중에도 답답했다. 아직까지도 썸만 타고 지내면서 고백은 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학교에서 어느 정도 크게 열리는 교내 장기자랑 대회가 열렸다. 당시 한국음악의 인기 덕분에 많은 중국 학생들이 한국 노래에 맞춰 춤을 췄었다. 위진이 또한 한국 아이돌 댄스를 준비했다. 그때도 나한테 "공연 보러 올 거지?"라며 연락이 왔었다. 나는 우민이와 같이 그 장기자랑을 보러 갔고, 위진이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고백을 굳게 다짐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그때 위진이가 다른 이와 눈이 맞아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교내 행사가 끝나고 나는 위진이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위진이는 고맙다며 웃었다. 나는 숙소로 이내 돌아왔고, 위진이의 무대 영상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고, 학교에서 약간 당일치기 소풍으로 놀이공원을 가게 됐다. 원래 내가 놀이 기구를 애당초 싫어했기에 가기 싫었지만 위진이가 가길래 나도 따라갔다. 우민이도 따라나섰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서로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장난도 치면서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나와 위진이는 같이 놀지 못했다. 나는 당시같이 간 한국인 유학생들끼리 놀았었기에, 나도 위진이와 같이 중국 학생들이랑 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각자 놀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뿅망치 장난감으로 티격태격하며 놀이공원에서 같이 놀지 못한 한을 풀 수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고 위진이와 같이 사진을 찍고 숙소로 향했다. 나의 고백 타이밍은 점점 멀어져 갔다. 소심하고 여렸던 마음 상태로 인해 타이밍을 연달아 놓쳤다. 나와 위진이는 언제서부터 인지 연락이 더욱 뜸해지기 시작했다. 반에서는 인사도 하고 놀았지만, 단순히 그 이상은 진전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바보같이 거의 1년 동안 고백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위진이 메신저에 1일이라는 문구가 적힌 이미지가 올라왔다. 나와 우민이는 이 사진을 보고 "얘 설마 다른 사람이랑 사귀나? 그럼 누구지?"라는 생각으로 일주일을 생각했다. 일주일이 지나 저녁 수업 반에서 공부 중일 때 한 친한 친구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몰래 나갔고, 그 친구가 또 다른 형을 내 눈앞에 데리고 왔다. 그 형 또한 당시에 친한 형이었다. 같이 유학 생활을 버티던 사람들이었어서 안 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 형과의 정은 깨지고야 말았다. 그 형이 “나 위진이랑 사귀어."라고 말하길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형도 1년 전부터 내가 위진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도 그거에 관련해서 그 형에게 여러 고민 상담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 형과 위진이가 눈이 맞은 건, 내 예상컨대 교내 장기자랑 때였다. 당시에 그 형도 춤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도 무대를 준비 중이었다. 그 형도 위진이와 친한 관계였고 바로 옆 반에서 공부했었다.
당시 교내 장기 자랑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학교 측에서 불러서 리허설 등등 여러 가지를 준비시켰기 때문에 이미 그때부터 서로 눈이 맞았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 형 얼굴조차도 보기 싫었다. 그냥 단지 위진이에게 잘해주기만을 바랐었다. 사귄다는 그 말을 듣고 난 후 며칠 뒤, 교내 체육대회가 열렸다. 나는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체육대회 내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위진이와 그 형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열불이 났었다. 그 후로 나와 위진이는 정말로 연락이 끊겼고, 서로 마주쳐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위진이는 그 형과 한 달 사귀다가 헤어졌다. 나는 대학 준비 때문에 이내 중국어 자격증반으로 옮겨져서 위진이와 서로 얼굴 보기 쉽지가 않았다. 우민이는 여전히 그 교실에서 공부를 했기에 간혹 위진이가 나 어디 갔냐고 물어봤다 한다. 고3 마지막 학기가 되고 나와 위진이는 교실 정리를 할 때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흔히 하남자라고 하는데 나는 그 하남자의 끝판왕이었다. 돌이켜보면 여태 1년간 고백도 못 하고 뜸 들인 건 나 자신인데 위진이한테 삐져서 말도 안 한 내가 한심하기는 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대화 나누지 못하고 위진이와 영원히 작별을 하게 됐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메신저로 간간이 어떻게 지내나 하고 염탐을 자주 했다. 대학교 초반에 위진이가 연락이 왔었다. 자기는 북경 쪽 패션학원으로 들어갔다고 말이다.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던 애가 중국 최대 패션 학원을 들어갔다니, 미술에는 재능이 있었나 보다 했다. 그러고선 휴일에 상해 갈 거 같은데 만날 수 있냐는 말을 했는데 나는 당연히 보자고 했다. 하지만 북경에서의 과제가 산더미라 올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이내 다시 연락이 끊겼다. 뭐 가끔씩 핸드폰 게임할 때 위진이랑 같이 할 때도 있었으나, 서로 말도 잘 안 하고 어색하게 게임하기 일쑤였다. 대학교 1학년이 지나고 정말로 문자 하나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국에 아예 자리를 잡게 되었고 시간 지나 우민이 덕분에 위진이의 인스타를 알게 되어 봤는데 역시 돈이 많아서 그런지 명품을 엄청 입고, 미모는 그대로였다. 남자친구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 이후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우민이에게 연락온 것이 “야, 위진이 결혼한다더라” 였다.
나만의 첫사랑 로맨스 영화가 드디어 결말을 맞이하였다는 것에 대해 뭔가 내심 아쉬웠다. 그때의 찌질하고 답답했던 내가 바보 같지만, 그 모습마저 그 시절의 추억이니 웃음으로 넘겨본다. 중국을 다시 가고 싶다기보다는 그 당시 그때로 가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나의 첫사랑이 존재했던 그곳은 나의 여러 찌질했던 감정들을 품어주었던 안식처였다. 친구 놈의 문자 한 마디가 오래간만에 잠시나마 뜻깊은 추억 여행을 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학창 시절의 첫사랑도 그립지만, 그때의 나 자신이 그리우면서 그때의 향기가 그립다. 그녀로 하여금 그 시절을 영원히 추억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녀의 인생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려 한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될 그녀만의 로맨스 영화도 좋은 스토리로만 이어나가기를 기원한다. 또한 각자의 청춘과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여러분에게 잠시나마 그 보석함을 열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