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정신질환을 달고 산, 근 몇 년간 나의 이야기
우울증, 공황장애 그리고 지금까지 극복 중인 불안장애
2018년도 중국 상해에서 막바지 생활할 때 나 스스로가 정말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17년에 대학교를 처음 입학하고 그 1년 동안은 아무렇지 않다가 2018년도 2학년으로 올라가고 나서부터 같이 대학교를 입학한 중고등학교 동기였던 형이 군입대를 하게 되고, 그를 뒤따라서 대학교에서 많이 친했던 형들 몇 명도 입대를 하게 됐다. 친했던 형들 몇 명이 군대를 간 후부터 갑자기 극한의 외로움과 우울감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대학교에서도 다른 형, 누나들과 어울려 지내긴 했지만 나의 모습이 1학년때와는 전혀 달랐었다. 사람을 매번 그리워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기 시작했다. 가끔씩은 중고등학교 동기 중에 다른 지역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 몇 명이 상해로 놀러 올 때나 아니면 내가 그 친구들이 있는 지역을 놀러 가지 않는 이상 상해 생활에서의 안정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행동과 말투가 안절부절못하고, 불안정했었다.
처음으로 나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때는 대학교 같은 학년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부터였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점차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중간에 담배라도 피우러 나가면 그 담배꽁초 불을 제대로 꺼야지만 마음이 놓였다. 담뱃불을 제대로 안 끄면 큰 불이라도 날까봐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날에 심지어 기숙사로 돌아오고 담뱃불이 제대로 꺼지지 않았을까봐 몇 시간 동안 노심초사 하다가 다시 택시 타고 30분 걸리는 그곳으로 다시 가서 내 담배꽁초가 꺼져있는지 확인했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같은 상해에 있었지만 다른 학교를 다니던 친구 집에 놀러 갔었을 때도 그 친구와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 담뱃불 때문에 계속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불안정한 내 모습을 본 친구는 놀라는 표정으로 정신 차리라는 말을 했었다.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불안했다. 누군가 나를 지속적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과대망상에 시달렸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힐 거 같고,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닌지에 관해 매번 신경을 썼었고, 누군가랑 술을 먹거나 대화하고 나서 내가 뭘 혹시 잘못한 게 없는지에 관해서도 그 사람에게 계속 물어보기 일쑤였다. 혼자 기숙사 방안에만 틀어 박혀 있고, 강의실을 가도 원래 친했던 사람들과 인사도 안 하고 대화를 피했었다. 잠시 밖에 나가서 환기라도 시키고 오면 괜찮아지긴 했지만 그건 정말 잠시일 뿐이었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서 폐쇄적인 국가였다 보니 더 불안했던 거 같다. 그냥 한국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글을 처음 쓰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냥 생각을 여러 가지 옮겨 적으면서 일기를 쓰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고 시작한 게 글쓰기였다.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중국 생활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죽을 거 같았다. 학교 졸업이고 뭐고 내 눈에는 그냥 한국 밖에 보이지 않았다.
2019년 6월에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게 되고 온라인으로 메일을 보내 대학교 자퇴 신청을 마친 뒤에 정신과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약수동에 살았는데 병원은 강남 청담동에 위치해 있었다. 청담동도 고등학교 때 몇 년 동안 살았던 곳이라 익숙해서 병원은 지도를 잘 안 보고도 잘 찾아갈 수 있었다. ( 물론 나는 방학 때만 와서 지낸 게 전부이지만 말이다. ) 첫 병원을 방문했을 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엄청나게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강남에 있는 병원이라 그런지 시설도 고급졌다.
처음 만난 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 그간 살아온 인생과 가족 관계 모든 걸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속사포로 이야기들을 내뱉었었다. 진단은 첫날부터 받을 수 없었다. 문항만 몇 백개 되는 또 다른 설문지를 일주일 동안 전부 체크를 해온 다음,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 검사를 제대로 받고 진단을 받은 병만 세 가지였다.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 정신질환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중국 중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었다.
뭔가 당시엔 웃기게도 올게 왔구나 싶었다. 중국에 있었을 때 나 왜 이런 거지 싶어서 인터넷에 여러 번 검색을 해봤었다. 뭔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들이 정신질환의 증상들과 비슷해서 설마 나 정신병인가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단서를 받은 날, 방송에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겪었다고 말을 했던 공황장애를 내가 겪게 될 줄이야 하면서 신세한탄을 엄청 했었다. 공황장애는 그렇다 치고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라며 진단서를 받고 병원 근처 벤치에 앉아서 혼자 하늘만 주야장천 바라봤던 거 같다.
그날 병원을 다녀와서 고깃집에서 저녁을 부모님이랑 먹게 되었는데 이걸 말을 할지 말지를 엄청 고민하다가 부모님한테 처음 꺼냈던 말이 “ 나 공황장애 있데 ”였다. 세 가지의 병을 다 말하기에는 버거웠다. 부모님은 이미 내가 정신과를 간다는 걸 알고는 계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우선 침착하게 받아들이시고 밥 먹자고 말을 하셨다. 아버지가 유독 침착하셨다. 지금 돌이켜 보면 침착하게 반응하신 부모님이 대단하실 뿐이다. 그때는 정신질환에 관해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미지들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정신병을 아들놈이 걸렸는데 나를 위해서 흥분을 애써 감추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그날의 고깃집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한몇 달 뒤쯤, 기존 강남에 있던 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을지로 백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옮기게 된 이유는 소형 병원에 다니기에는 증상이 심각했기에 더 큰 대학병원을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 때문이었다.
정신과를 옮기면 번거로운 점이 하나 있다. 전에 했었던 그 몇백 개 되는 문항지를 다시 해야 됐기 때문이다. 문항지를 다시 전부 체크하고 며칠 뒤 재차 상담을 받고 검사를 진행했다. 대학병원 교수님도 첫 정신과 선생님과 비슷하게 원인은 중국에서의 생활 때문인 거 같다고 하셨다. 백병원 정신과 교수님은 굉장히 인자한 분이셨다. 후엔 그 교수님이 다른 병원을 가시게 되고 다른 교수님과 상담을 진행해야 했지만 말이다.
백병원을 제대로 다니기 시작한 날, 내가 약을 받는 걸 기다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잠시 전화하고 오겠다고 나가셨는데 나는 그새를 못 참고 아버지를 몰래 뒤따라가서 전화하시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랑 전화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중고등학교 때 한국부 원장님이었다. 아버지가 전화하면서 애가 이모양이 될 동안 뭐 한 거냐라며 버럭 화를 내시던 모습을 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병원 안으로 다급히 들어와 약 나오기를 기다렸다. 약을 받고 집으로 가는 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 아버지랑 나 둘 다 아무 말 없이 집으로 향했다.
시간 지나 얼마 안 가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됐다. 엄청난 사회적 격변기의 시작이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정신질환 환자가 상당히 늘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 당시 체감이 되었던 것은 멀쩡하던 친구 몇 명이 나한테 정신과를 추천해 달라는 연락이 왔었다. 그때는 모두가 힘든 시기였기에 어디 가서 나 힘들다 티를 내지는 못했던 거 같다.
중간에 약수동에서 장안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병원을 또 바꾸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삼육병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병원에서 선생님을 잘 만나 아직까지도 잘 다니는 중이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세 번째 병원을 변경할 때도 문제는 그다지 없었다. 당시 약을 좀 먹으면서 생활을 했을 때도 우울감이나 공황증상이 쉽사리 나아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불안감도 많고 예민한 성격도 한 몫해서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한 1년 정도 택시만 타고 다녔었다. 사람 많은 대중교통이나 장소만 가면 매번 극강의 불안감과 공황증상이 밀려왔다. 군대에 갔던 친한 형이 중간에 휴가를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사동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그 형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었다. 형도 묵묵히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지금 와서 형은 그때의 나를 이렇게 회상한다.
진짜 당장이라도 죽을 거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사실은 자살충동만 수도 없이 느껴서 정말 극단적일 때 동호대교 난간으로 걸어가서 뛰어내릴까 하고 다리 밑에 한강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약을 꾸준히 잘 먹다가 어느 정도 스스로 괜찮아졌다는 느낌이 오면 혼자 스스로 단약을 몇 번 했었는데 그런 행동들을 자주 반복하고 나서 뒤에 더 큰 우울감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나아졌다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매일 먹으며 관리를 해야 하는 마당에 잘못된 행동들만 했으니 몇 년간 괜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은 꾸준히 병원을 다니며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전처럼 자살충동이나 공황증상은 없지만 불안은 언제나 쉽사리 나아지지는 않고 있다.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찌어찌 제일 문제가 컸던 우울증과 공황장애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모든 정신질환은 이어져있기 때문에 불안장애를 잘 컨트롤 못하면 또다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재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 5년간 세 가지 병을 겪으며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우울증은 사람을 죽음으로 까지 가게 만드는 정신질환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한다. 걸리면 정말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한 병이다. 단순히 마음의 감기가 걸린 것뿐이야라는 말이 통하지는 않는 전혀 스스로 컨트롤이 불가한 마음의 병이다. 남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고 본인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 우울증이기에 그건 오로지 약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인들의 진정 어린 공감과 위로도 필요하다.
2. 공황장애 또한 본인이 통제하기 힘든 그 숨 막힘과 심장떨림 등, 극강의 불안감들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그런 증상들 중 하나라도 있다면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가끔 건강검진까지 받고 몸에 이상도 없는데 심장이 멈출 거 같고 숨 막히는 두려움이 몰려온다면 정신과를 가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공황장애는 신체적인 증상으로 자신의 불안이 나타나기에 사회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주는 병이라고 보인다.
3. 지금까지 이어지는 불안장애는 이 두 질환으로 이어지는 출발선에 놓인 병이라고 보여진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불안감이 신체적으로 가끔 나타날 때가 많다.
공황장애와도 연결되는 게 이런 부분들이다. 본인이 불안을 느낀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몸이 저절로 반응을 한다. 심장이 급격히 많이 뛴다거나 혈압을 잴 때 수치가 많이 올라가기도 하고, 위의 더부룩함도 있으며 자율신경계를 자극해서 땀이 많이 날 때도 많고 몸이 스스로 떨릴 때도 간혹 있다. 극도의 긴장 상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극도의 긴장상태라 함은 장소 혹은 분위기에서 나타난다. 사람이 많은 지역이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럴 때 땀을 좀 많이 흘리는 편이다. 다리를 떨 때도 간혹 있다. 다리를 떤다는 건 남들에게 티가 나면서 떨리는 게 아니라 본인만이 느끼는 근육 떨림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르실 거 같다.
불안은 공황을 만들고 그 공황으로 인해 밖을 못 나가서 우울에 빠지게 된다. 우울증은 사람이 그리운데 오히려 또 사람을 꺼리게 되는 이중적인 마음이 들고 밖을 안 나가고 침대에만 누워있고 싶게 만들며 뭘 해도 흥미나 의지도 전부 바닥을 내려찍게 만든다. 반드시 이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 누군가라도 없다면 창문이라도 열고 그 창문에 비치는 햇빛을 느껴보고, 샤워도 하고, 새벽에 자지 말고 저녁에 자서 아침에 일어나는 이런 식으로 사소한 패턴 변화를 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처음부터 힘들게 운동을 하려 하거나 밖을 나가려고 억지로 노력을 안 해도 된다. 우선 주변 환경부터 변화를 주면 시작이 된다.
불안은 생각의 꼬리를 연이어 만든다. 불안이 깊으면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지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되는데 극도로 예민해져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너무 과도하게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게 될 때도 있다. 감정적으로 대하는 부분들이 많아진다. 이런 수많은 증상들이 나아지려면 치료 약에 오로지 집중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5년의 시간들을 전부 돌이켜보면 가족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지금 와서는 뼈저리게 느낀다. 부모님한테 얼마나 원망 섞인 말들을 많이 내뱉었는지 모른다. 당시 고등학생인 어린 나이였던 우리 동생도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익숙해지느라 고생을 또 얼마나 했을까 싶다. 몇 년을 묵묵히 바라보며 지켜준 가족에게 정말 고맙다. 그리고 지인들에게도 고맙다. 아직까지도 스스로 고군분투 중이지만 적당히 괜찮아지기까지 지켜보고 위로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약도 약이고 본인이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는 것도 정말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곁에 누군가가 정말 없다고 해도 본인 의지로 병원을 들어서며 약을 먹고 진전해 나가다 시간 지나면 어느 한 사람 그리고 몇 사람이 그 치유의 과정을 더욱 증폭시켜 줄 것이라 믿는다.
현재 비슷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수많은 환우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끝으로 오늘의 글을 마친다.
“ 우리 각자 자신만의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해 나가며 같이 이겨냅시다. 밝은 빛이 보이는 곳은 눈앞에 이미 존재해 있지만 아직은 깊게 드리워진 주변의 어둠을 게워내는 시간이 더딜 뿐인 것입니다. 훗 날 그 어둠이 점차 걷혀 다시 눈앞에 밝은 빛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매일매일 하루 속에서 열심히 그 어둠을 게워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수많은 분들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