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리다 Nov 20. 2023

시간이 약이라는 말

100일을 견디면 사람이 된단다

한 계절은 3개월, 약 100일이다.

봄이 오려면 100일의 겨울을 견뎌야 한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깊은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 일러 주었다. 우리가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견뎌야 할 것은 쑥과 마늘과 고독, 그리고 100일이라는 시간인 것이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매일이 고통스럽던 나날, 누군가 시간이 약이라 위로해 주었다. 3개월을 버티면 괜찮아진다고 해서 필사적으로 3개월을 버텼다. 친구랍시고 전 남친이 자꾸 연락해 대고 아는 척을 해대는 통에 3개월을 버텨도 나아지기는커녕 세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그 사람이 좋아 결국 다시 사귀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시간이 약이란 말을 제대로 실감할 수가 없었던 것인데 지금은 별 수없었다. 떠난 그 사람이 영영 돌아오질 않아 3개월이고 3년이고 그냥 그대로 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일분일초 살갗을 에는 고통이 치밀어 숨을 쉴 수도 없던 내게 시간이 약이란 말은 험난한 절벽을 맨손으로 올라가란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매달려 있는데, 절벽 아래 구경온 사람들이 잠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는 힘내라 힘, 하는 것처럼 약 오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참,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다. 24시간이 지나면 하루가 갔고 100일이 지나면 한 계절을 지나며 365일이 쌓이면 1년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모든 위로의 말들이 다 고맙고 귀했고, 그중 가장 와닿은 말은 결국 시간이 약이라는 상투적이고 뻔한 위로였다.


어느 새벽엔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눈이 떠졌다. 문득 침대 머리맡에 걸어둔 당신의 영정을 올려다보는데 당신 얼굴이 어스름한 어둠에 묻혀 보이질 않았다.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시간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당신의 얼굴을 떠올릴 때 당신 얼굴이 저 모습으로 기억날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잊겠구나.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자체로 내 세상이었던 당신을. 그것은 두렵고 희망적이었다. 나는 내 기억력을 한 톨 한 톨 쥐어짜서라도 당신을 기억하고 싶었고, 내 뒤통수를 때려서라도 당신을 잊고 싶었다.


산다는 게 그랬다. 너 없인 하루도 못살겠다던 내가 너 없이 이만큼이나 산 것은 시간이 무언가를 지워가는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슬픔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런 슬픔은 퇴색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슬픔으로 변해가는 것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그것도 시간이 해낸 일이었다.


아마 나는 살아가는 동안 오래도록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봄이 올 테고,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아주 여린 새싹이 여상하게 움틀 것다.

이전 09화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