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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Nov 17. 2024

고집 센 시어머니와 못된 며느리(1)

거절은 거절당했다.

우리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남편이 군대에 가기 직전에는 거의 매일 붙어있었다. 그러다 남편이 입대를 했고 나는 휴학과 복학을 거쳐 남편보다 조금 일찍 사회인이 되었다. 남편이 타 지역에 있는 직장에 취직하면서부터는 꽤 오랫동안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었다.

차가 없었던 내가 남편이 있는 지역으로 가려면 편도 3시간 정도가 걸렸다. 하루 안에 데이트를 마치는 게 노동이었다. 고지식한 나로서는 얼른 공식적으로 외박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꽃다운 20대 막바지에 결혼을 서둘렀다. 연애기간이 길었던 것도 결혼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린 서로가 서로의 마지막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린 양가의 도움 없이 결혼을 준비했다. 양가 형편이 넉넉지도 않았거니와, 결혼은 둘이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연애기간 내내 쿨한 줄 알았던 시어머니 간섭과 고집이 뜻밖에도 심했다. 결혼을 계획하고 양가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하자,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나이가 결혼하기엔 이르지만 여자 나이가 많으면 출산에 지장이 있으니 결혼을 하긴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어머니가 참 담백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때, 시어머니가 남편이 사는 지역 주변을 알아보더니 신축 미분양 아파트를 계약하게 했다. 차가 없인 다닐 수 없는 곳이었고 우린 둘 다 차가 없었다. 입주기간까지 2년 넘게 남아있었다. 계약 직전에 남편이 내 의향을 물어보긴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어차피 각자의 직장 때문에 당장 같이 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년 뒤에 같이 살 수 있을지, 그 집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지 아무 계획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집을 서둘러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계약금을 준다고 해도 싫었는데 심지어 빌려주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한테 돈을 빌리면서까지 그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굳센 의지와 결혼 전부터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내 우유부단함이 맞물려 우린 결국 그 집을 남편 명의로 계약했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어머니에게 빌린 계약금부터 갚았다. 가뜩이나 간섭하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한테 돈 몇 푼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사는 지역으로 왔다. 갖고 있던 아파트 분양권을 팔아야 했다. 입주 때가 다가왔지만 집을 산다는 연락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손해를 보고 분양권을 팔았다.


결혼 초 시어머니는 신혼에다가 주말부부였던 우리자꾸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우리끼리 데이트를 하고 오면 돈 아깝게 밖에 나가서 밥을 사 먹냐고 못마땅해했고,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 오랜만에 부모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으냐 투덜대셨다. 며느리라는 가족구성원이 추가된 새로운 가족형태를 즐기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보상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시부모님 사이의 불화에 희생되고 싶지 않았다. 다가 은근슬쩍 부엌일 며느리의 본업이라 하며 아들도 모르는 제사 날짜를 알려주시는 어머니의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다만 남편에겐 소중한 어머니라는 생각만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을 뿐이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때문에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근검절약이 삶의 지침인 시어머니는 내게 누가 버린 걸 주워 온 것 같은 낡은 버린 물건들을 주시려고 했다. 탄 자국 완연한 나무 냄비받침과 살이 부러진 빨래건조대 같은 것을 받았다. 거절은 거절당했다. 좋게 돌려 거절하다가 지쳐 직설적으로 말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벽에다 말하는 것보다 답답했다.


처음엔 당연히 남편에게 거절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남편이 뭔 말을 해도 어머니는 들을 생각을 안 했다. 애초에 남편은 평생 엄마에게 대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순둥하게 하는 말들이 어머니에게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불쌍하고 고생 많이 한 엄마와 그 엄마한테 시달리는 아내 사이에서 남편은 좀 방황했다.


하루종일 일하고 고단한 몸을 끌고 집에 오면 예고도 없이 어머니의 박스가 와있었다. 방금 밭에서 캐 온 손질 안된 날것의 재료들이 2인 가구에 두 박스씩 배송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나물을 손질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고사리를 물에 담가 독기를 빼고 삶고 말렸다. 그대로는 보관할 곳이 없었고 상하기도 쉬워서 미루지도 못하고 다듬어야 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지인들은 딴 사람을 주면 되지 뭣하러 싸우냐고 하기도 했지만 내가 싫으니 다른 사람도 싫어할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정 많은 시골처럼 이웃과 친한 것도 아니었고 뭣보다 누구에게 줄 만큼 채소 상태가 썩 좋지도 않았다. 못나고 썩고 시든 것도 많았다. 그냥 안 주셨으면 했다.


어머니의 박스가 올 때마다 우리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매번 싸울 순 없어서 몇 번은 참았는데 그중 몇 번은 못 참았다.


남편은 어머니의 박스가 오면 자기가 알아서 다 정리하고 손질해 둘 테니 신경 쓰지 말라 나를 달랬다. 당시 남편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이직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가 신경 쓰지 않게끔 집안일의 대부분을 기꺼이 도맡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가 아껴준 시간을 그런 곳에 낭비하는 게 신경질 났고 배려도 타협도 없는 시어머니의 고집도 진력이 났다.


어머니는 자꾸만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식을 강요했다. 못 들은 척 흘려들으려 해도  당신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속이 뒤집어지도록 끈질기게 비꼬거나 그냥 연을 끊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걸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평생을 휘둘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셨으면 차라리 참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한창나이인 시어머니가 평생 동안 그런 식으로 간섭할 거라고 생각하니 시어머니보다 허리가 더 굽어버린 며느리 이야기가 생각나 소름이 끼쳤다. 어찌 보면 고부간의 기싸움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도 양보할 생각 없이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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