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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Dec 08. 2024

기다림의 자세

남편의 생일을 보내며

수납장을 치우다가 남편의 물건들을 모아둔 상자를 발견하고는 무심코 상자를 열어보았다. 남편의 신분증, 통장, 도장, 수첩, 그리고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다. 일부러 추억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남편의 생일날 보냈던 편지들이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었다. 줄무늬 포장지로 덮인 납작한 상자를 열었더니 조개껍데기와 모조진주, 클레이로 만든 펭귄 사이로 내가 정성스럽게 적은 글자들이 드러났다. 나는 가끔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선물하곤 했는데 이건 조금 특별한 걸 주고 싶어 만들었던 상자 편지지다.


'올해도 네 덕분에 풍족하고 따뜻한 겨울이네. 네가 좋아서 겨울도 좋아. 내 아름답고 고된 시간들에 함께 해줘서 고마워. 늘 힘이 돼.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생일 축하해. -2014년 12월'


짧은 편지글 아래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전문이 적혀 있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 <즐거운 편지> 전문


나는 그중 첫 번째 연을 내가 직접 만든 청첩장에 넣었더랬다.

디자인은 다 해놓고선 청첩장 문구를 한참 고민하던 중에 이 시 꽂혔다. 우리의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시였다. 일상적이지만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그 사람이 언제나 공기처럼 사소하고 중요하게 있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모든 순간들에 서로가 힘이 되고 의지가 될 것을 믿었다.

 

이제 와서는 두 번째 연에 시선이 간다.

사실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이 부분에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그에게 보냈던 편지를 몇 개 옮겨본다.


'안녕, 여보. 어제 집 앞에서 웬 노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언덕을 올라가는 걸 봤어. 낡은 옷차림에 주름 깊은 얼굴들이었는데, 그 사랑엔 아직 주름이 없는 것 같아서 부럽고 고마웠어. 우리도 주름 없이 사랑하자. 다 늙고 난 뒤에도 사랑받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다정하게 손 맞잡고 가자. 누군가 우리를 돌아보며 부러운 눈길로 불륜이 아닌가 의심할 때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생일 축하해 -2016년 12월'


'사랑하는 여보, 너는 매일매일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오늘을 또 특별하고 소중하게 하고 싶은 건, 네가 그렇게 항상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순간 되새기고 싶기 때문이야. 세상에 있어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2017 12'


'첫눈 오는 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당신이어서, 첫눈이 오면 가장 먼저 나를 생각해 줄 사람이 당신이어서 행복해. 벌써 결혼하고 나서 네 번째 맞는 당신 생일이야. 아이가 태어나면 네가 이렇게 멋진 남편이 아빠인 것을 잘 가르쳐 줄게. 우리 아이는 엄마 덕분에 좋은 아빠를 만났네. 행복한 엄마, 아빠가 되어주자. 늘 고맙고 사랑해. 항상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있어줘. -2019년 12월'


'요즘 무서울 정도로 행복하네. 당신 덕분이야. 언제나 조금씩 더, 확실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여보, 나, 우리 아기, 늘 건강하고 행복하자.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다 늙어 쪼그라들어도

너는 내가 걷어찬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 나는 잠든 네 머리맡의 베개를 바로잡아주며, 또 너는 아침 출근길에 내 신발 속에 우산을 넣어주고, 나는 술에 취해 귀가한 너에게 꿀물을 타주며... 아기가 우리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행복을 배울 수 있도록 그렇게 살자. -2020년 2월'


나는 아직도 그의 생일마다 작은 케이크를 준비한다. 초는 꽂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 때문이다.

이제 내게 그의 생일은 그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되새기는 날일 뿐이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던 우리의 천진한 약속들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나는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배경들 뒤로 당신의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나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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