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번외야.

목격자에서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

by 세렌디퍼


나를 중심으로 360도 회전 카메라가 돌며 찍어대듯, 도착한 공항은 어지러웠다.

'이런 악몽도 있다고?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인가?' 비현실적인 내 눈앞의 현실이, 그저 황망했다.

'다음 장면은 어떤 씬이지? 오열하는 상주의 모습? 머리채를 잡히며 남편 잡아먹은 팔자 사나운 비련의 주인공?'


그 어떤 장면도 받아들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연성이 떨어졌다. 12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자 도망치듯 나온 그날의 내가 생각한 갖가지 변수에는, 이건 없었다.


번외였다.

차마 아이들에겐 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돌아와야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공항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소식을 듣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친구 부부가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발견하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내뱉을 수 있었고, 그제야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과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360도 회전 카메라 따윈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웃포커싱 된 나만, 정지 상태였다.

"아, 진짜다..."



4살로 추정되던 나이의 나는,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버지라는 폭군의 강압에 못 이겨 바닥을 기어 다니며 갖은 고문과 학대를 당하던 가정폭력의 유일하고 지속적인 목격자였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생모와 닮아서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불특정 다수의 여러 날 매질과 벌을 받아내는 피해자였다. 주홍 글씨를 온몸 구석구석에 새긴 것도 모자라, 밤이면 내 몸뚱이가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변해 온 세상이 "재수 없는 년"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 같아 옷을 껴 입고 또 껴 입었다.

그래도, 견뎌냈다. 나를 잉태하고 낳아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사랑"을 세상 속에서 배우고 싶었다.


아차, 여기서부터 꼬인 걸까? '사랑'따윈 욕심내지 말았어야 했다. 허기진 사랑을 배우고, 받고 싶어 서툴게 결정했던 나와 그 사람과의 인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막을 내렸다. (차라리 드라마 한 장면처럼 모든 게 꿈이었다면? 아직도 그 꿈 속이라면.. 젠장)


공항에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30년 전 친부가 내게 새겨준 주홍글씨가 살아나, 내 안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감추고 싶어 입고 또 입었던 나의 외투가 누군가에 의해 낱낱이 발가벗겨졌다. 어디든 작은 구멍이 있다면 머리만이라도 넣은 채,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생부가 어디선가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너는 네 엄마를 닮아 진짜 재수 없는 년이라며.



그렇게 나와 아이들을 태운 친구 부부의 suv는 어느새 남편의 장례식장 주차장에 들어섰다. 나는 알고 있었다. 친구 부부도 마주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엿같은 현실에 속도를 전혀 내지 못하고, 그저 주행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엔, 기어코, 어차피 , 종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나의 남편 장례식에_



태양계의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난 나의 포지션은 다채롭게 전환되었다.

4살의 가정 폭력의 지속적인 목격자에서 12살의 피해자, 그리고 어느새 남편을 잡아먹은 가해자가 되어 버린 밤이었다. 하필 그즈음, 고유정 남편 살해사건은 이 세상을 한 번 더 떠들썩하게 만든 후였다. 나는 그렇게 남편 잡아먹은 여편네가 되었다. 하마터면 나는 제2의 고유정이 되어 유명세를 탈 뻔했다.


그 누가 내 등뒤로 속삭였다.

"제주도행이어서 천만다행이네. 행적이 확실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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