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살에 과부가 되다.
이혼도 사치였던 나의 숙명
때는 겨울방학이 시작할 무렵,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홀로 1년이 넘게 준비한 이혼 서류가 마무리되고 나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긴 채 아이들과 서둘러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내용은 뻔한 이야기였다.
"부부의 인연은 끝났지만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부모로 남자. 변호사 선임하고 연락해." 주절주절...
텅 비어버린 방과, 남겨진 나의 편지는 그에게 충분히 진절머리 나고 두려운 결혼생활을 종료하겠다는 의사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혼 통보를 받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을 상상했다.
"변호사 선임을 할까? 그냥 잠적해버리지 않을까? 알아서 하겠지? 난 아이들하고 일단 살 궁리나 하자. 그리고 이제 겨울방학이고 크리스마스잖아." 하며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비행기를 탔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들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나의 기분과 얼굴을 살피며, 맞추곤 했기에 우린 그럭저럭 아빠가 바빠서 못 온 반쪽짜리 가족 여행 행세를 시작했다.
나 또한 유년 시절 가정폭력 안에 살아온 터라, 그들의 무거운 공기와 폭력과 괴성이 사무치도록 두려웠다. 특히 엄마의 외상 후 스트레스는 나와 내 동생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곤 했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굴레를 엄마가 끊어주기 바랐다. 우리 가족의 괴담은 우리 집에서 '엄마'가 사라지면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귀가한 텅 빈 교실에 남아 학교에서 글쓰기 대회로 나누어 주었던 빨간 원고지에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위해 참으며 산다는 그 말 대신, 나를 위해 이혼해 주세요."
그리고 실제 그들은 몇 차례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더니 결국 완전히 갈라섰다. 하지만 그때까지 난 '엄마'의 그 역할을 내가 대신하게 될 줄 몰랐다. 난 나의 '엄마' 대신 생부의 "개 같은 년"으로 대체되어 살기 시작했다.
열두 살의 그때의 나와, 지금 나의 아이들은 같은 영혼이었을까? 적어도 2019년 그 겨울엔 같을 것이라 단정 지었는데, 지금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 12월 제주 바람은 우리의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날 선 우리 세 모녀의 마음과 달리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애써 현재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불안과 긴장을 잠시 잊고 우리 모녀는 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도 가격표를 보지 않고 먹고, 소리 내어 웃었고, 아이들은 애정하는 아이돌 춤까지 추며 제주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내 아이들이 이리 밝게 웃으며 떠들 수 있었던 아이들이었구나.' 마음 한편이 아렸지만 겉으로는 참 평안한 밤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간 달았던 소주 한 잔이 유난히도 쓰던 밤이었다.
이틀 째 되는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ooo 씨 아내 분 맞습니까? 여기는 ooo 경찰서입니다."
우린 4박 5일의 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비행기에 올라탔다. 새벽의 깜깜한 밤하늘이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이혼녀가 아닌 '미망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