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자고 했더니 죽어버린 당신 자식보다.
신이 나에게 100살의 목숨 값을 주셨다면, 39살 이후 남아있을 60여 년 여생의 '뻔뻔함'을 다 끌어 발걸음을 떼었다. 단언컨대, 아이들이 없는 혼자였다면 용기 따위 필요 없었다. 하이에나에게 습격당하는 고라니처럼, 물어뜯기고 쥐 흔들리고 찢기는 대로 나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닌 엄마였다.
아직 문상객이 많지 않아 텅 빈 주차장에 내려 아이들에게 다급하게 둘러댔다.
고작 생각해 낸 아빠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교통사고.'
이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로 조만간 금방 들통날 새빨간 거짓말을 어설프게 둘러댔다. 큰 아이는 출산 후 내뱉는 첫 숨처럼 울음을 터뜨렸으며 둘째 아이는 멍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정신이 아닌 무소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게 돌진했다. 날아오는 돌을 맞을지라도, 쏟아지는 욕지거리를 받아낼지라도, 귀싸대기가 날아와도, 난 꼭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제 새끼들은 제발 살려주세요.
" 제 새끼들은 제발 살려주세요. 저를 욕하고 때려도 좋으니, 제발 아이들에게 오늘만이라도 아무 말 말아주세요. 교통사고요. 제발 교통사고여야 해요..."
엄마와 나선 제주도행이 유년 시절 내게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아이들에게 사라지질 않을 또 다른 '주홍글씨'로 새겨지는 건 막아서야 했다. 이혼하자고 했더니, 죽어버린 당신 자식보다 아비 잃은 내 새끼들이 천만 배 불쌍하고 가엽다고 되려 울부짖으며 따져 묻고 싶었다. 12년 동안 사건의 피해자와 목격자로 살아온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슬픔도, 상실감도 아닌 위장까지 뒤집히는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는 것도 난 삼가 했다. 온전히 오롯이 내 새끼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눈물의 석고대죄하는 것이 내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의 어미의 마음은 어땠을지, 엿보고 싶지도 않다.)
큰 아이 만삭 기념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을 사소한 다툼이 만삭의 배를 걷어차이던 날이 처음 기억이다. 아니다. 처음 시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다음 날 돌아와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을 때, '칼'부림을 한 그날부터 착하고 착한 순한 그 사람은 수시로 변했다.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난 참고 견디는 것이 강점이기에, 또 참아냈다. 누구보다 '대물림'이라는 속성을 증오하고 외면했다. 설마 내 생부(아버지)와 똑 닮은 사람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배우자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는 실패자이자 루저이고 병신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미 시작된 짧은 결혼 생활을 수정하고 새로고침하고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혼'을 탈출구라 여기며 대화와 제안과 협박과 타협을 이미 10년 전부터 수없이 시도했으나, 끝끝내 성공하지 못한 채 맞이한 결말이 '과부'라니.
"나에겐 이혼도 사치였구나. '이혼'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삶. 대체 누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들로 나를 이끄는 거야?"
거기 누가 좀 대답해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