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 인연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휴대폰을 바꿀 때면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게 전화번호를 옮기는 절차이다. 한 사람은 보통 200명 정도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데 나의 경우엔 거의 2,000개 정도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번호를 이동시키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오랫동안 영업관리를 해오면서 그만큼 시절 인연들이 많았던 탓이다. 이제 연락도 않는 사람들 번호는 정리해야지 싶었는데 최근 다른 생각이 있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떤 형태로든 한때 인연 되었던 사람들이고 은퇴 후 본격적인 SNS 활동을 할 때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두자는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일부러 지우는 전화번호가 더러 있다. 그 이름을 보면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간혹 그런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면 즉각 심리적 방어태세로 전환되곤 한다. 이전에는 이런 사람들도 나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심리상담가의 영상을 본 후로 이런 번호들은 가급적 지우게 되었다. 마치 인연을 끊기라도 하듯 ‘삭제’를 터치하면 묘한 쾌감도 인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과거 어떤 사안으로 내가 끌려다니거나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다. 인간은 스스로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 심리적 위축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운 상황을 가정해 보자. 저쪽에서는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당연히 나도 그를 안다는 전제하에 전화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휴대폰에서 지웠기에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번호만 뜬다. 전화 상대는 나에게 아주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넬 것이다.
A: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B: 누구십니까?
A:(잠시 당황하며) 저 예전에 어쩌구 저쩌구 했던 누굽니다.
B: 아, 네.. 안녕하세요.
이게 어떤 상황일까? 이제 그와 나는 과거의 관계를 끊고 새롭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관계로 리셋하는 상황이다. 살면서 나에게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참에 그냥 전화번호를 지워버리자. 물론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좀 곤란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번호를 지워두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름부터 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일은 좀 줄어들 것이다. 상대도 자신의 이름을 저장조차 하지 않는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라면 시절 인연이 지나면 과감히 삭제하자. 그냥 “안녕~잘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