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지도

몽생미셸 가는 길 5화

by 오래된 타자기


일곱 번째 지도는 중세 때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몽생미셸로 향했듯이 순례 코스도 참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아마도 걸어서 도보로 이동하는 듯 〈몽생미셀로 가는 길〉협회가 제작한 지도상 코스는 모두 여덟 코스에 해당합니다.


협회에서 제작한 기념 배지에는 몽생미셸과 함께 십자가와 가리비 조개껍질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성 야고보를 뜻하는 말이 가리비 조개[1]이고 대서양에서 흔히 나는 이 아주 맛있는 조개를 가리켜 프랑스어로는 생 자크(Saint Jacques)라 부릅니다. 생 자크가 바로 성 야고보인 셈이죠.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가리비 조개 요리를 맛보려면 ‘야고보 성인’을 외쳐야만 합니다.


모두 합해 여덟 코스에 달하는 순례길은 파리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비롯하여 고딕 성당이 있는 루앙, 바이킹 노르만족의 거점이었던 캉, 12세기에 세계 최초로 색유리창 제작 전문 기술을 전수하는 공방이 생겨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기술이 고딕 건축 양식에 접목된 샤르트르, 루아르 강가의 고성 지대에 위치한 앙제르, 대서양가의 생 나자르, 영국 아일랜드로부터 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던 셰르부르와 바흐플뢰흐 등, 모두 여덟 개의 순례 코스가 실핏줄같이 몽생미셸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코스에 더해 몇 개를 더한 코스가 있지만, 몽생미셸로 향한 대표적인 코스는 여덟 개면 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뒤적인 지도 가운데 그 어떤 지도도 12코스를 제시한 지도는 없습니다.


파리 샹젤리제 개선문 주위 원형의 광장은 정확히 30도 각도로 12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습니다. 1년은 열두 달이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열두 사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몽생미셸로 가는 길은 많아야 11개입니다. 하나가 부족하죠. 이게 바로 몽생미셸로 가는 길입니다. 프랑스는 매사가 도식적이긴 하지만 몽생미셸로 가는 길이 도식적이지 않은 까닭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상한 지도가 하나 있습니다. 여덟 번째 지도는 참으로 기이하기만 합니다. 10세기 초반 노르망디 지역을 가리키는 지도여서 그런지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시대 유럽은 북쪽에서 남하한 바이킹들에 의해 파괴와 약탈이 일상으로 자행되던 사회였습니다. 바이킹의 남하는 유럽 각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불러일으켰고 북쪽에서 남하한 바이킹들이 점령한 땅에는 왕국이 새로이 들어섰습니다. 영국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국, 프랑스 대서양 가의 노르망디 공국,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 그밖에 키예프 공국이 새로이 건설되었죠. 바이킹의 침공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911년 노르망디는 루앙 일대를 점령한 바이킹의 수장 롤로가 프랑크 국왕 샤를과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에 따라 할양된 노르망디 지역에 세워진 노르만족의 왕국이었습니다.


프랑스 어로 롤롱(Rollon)이라 불리는 롤로는 세느 강을 따라 파리에까지 침략을 감행한 장본인입니다. ‘단순왕’이라 불렸던 샤를은 롤로의 침공이 두려워 서둘러 그와 조약을 체결하고는 루앙을 비롯한 노르망디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죠.


롤로는 루앙 대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영세를 받은 뒤 루앙의 백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911년은 프랑크 왕국이 노르만족이 점령한 땅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한 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 침투한 롤로와 그가 이끄는 바이킹들이 세느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이 일대를 점령하고 국가를 세운, 그것도 역사적인 조약을 성사시킨 해가 바로 911년입니다.


933년에는 센마리팀 지방을 위시하여, 위레, 오흔느, 칼바도스, 망슈에 이르기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걸쳐 백작령이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루앙의 백작으로 노르망디 전역을 아우르던 무소불위의 권력자 롤로는 사망하여 루앙 대성당에 묻히고, 그의 아들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이 롤로를 계승하는데, 그도 죽자 아들 리샤르 1세가 이를 계승하여 노르망디 왕국을 이끌어갑니다.


리샤르 1세 때 처음으로 훼깡(Fécamp)이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리샤르 1세는 이곳에 자신의 거처로 삼을 요새와 대성당을 지었죠. 또한 수도 다운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훼깡을 정비했습니다. 이 대서양가에 위치한 해안 도시는 실상 저 북쪽으로 향한 바닷길과 잇닿아 있었으며 내륙으로 통하는 요충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샤르 1세를 계승한 리샤르 2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국을 노르망디 공국이라 선포하고 스스로 공작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비로소 백작의 시대에서 공작의 시대로 이행한 것입니다.


리샤르 2세 때 노르망디 공국은 정점에 올라서는데, 이는 리샤르 2세가 경건하고도 두려움을 모르는 아버지 리샤르 1세를 이어받아 교회를 재정비하고 수호했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이 비로소 로마 가톨릭 문명의 수호자로 변신했음을 입증해 주는 훌륭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리샤르 2세는 시토회 수사였던 기욤 드 볼피아노를 훼깡에 초대하여 자신의 선조들이 파괴한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도 합니다. 이때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 20여 명이 볼피아노와 함께 훼깡으로 건너와 노르망디 공국의 기독교 문명을 재건하는데 일조합니다.


처음 가톨릭으로 개종한 롤로로부터 리샤르 2세에 이르기까지 바이킹의 후예들은 일찍부터 고대 로마 문명이 정착한 노르망디 지역을 더욱 발전시킨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리샤르 2세는 리샤르 3세로 이어지고, 다시 너그러운 로베르(로베르 르 르 마니피크)로 이어지다 로베르의 서자인 기욤으로 이어지는데, 1066년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이 바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었던 사생아(Bâtard)란 별명이 붙은 기욤입니다. 그는 노르망디에 안주하지 않고 선조들이 세운 영국의 국왕 자리에 오릅니다. 그렇기에 역사가들은 그를 ‘정복왕 기욤’ 또는 ‘영국 왕 윌리엄’이라 부르는 것이죠.


한 장의 지도는 이처럼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오늘날 노르망디라 함은 ‘북쪽 사람들이 점령한 땅’을 가리키는데, 노르만족이라 불리던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고 추위와 궁핍에 시달린 이들이 남하하여 찾아낸 땅이 노르망디였으며, 이 비옥한 땅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바이킹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파괴했던 중세 기독교 문명을 재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노르망디 역사유적들은 이 시기에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울러 이때 이들이 지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물들은 한결같이 오늘날 프랑스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문명의 가치는 당시 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기여하고 공헌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회 건축물들만 아니라 경제를 발전시키고,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터득한 이들이 교환경제의 가치를 인식하고 시장을 활성화한 것은 물론이며, 영국을 정복함으로써 수출을 늘리고 경제적 풍요를 촉진한 것은 경탄할 일일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요새와 성과 수도원들을 비롯하여 대성당을 세운 빛나는 재능은 두고두고 회자될 역사적 사실에 해당합니다.


11세기 바이킹 후예들에 의해 견인된 기독교 문명은 많은 도시들을 탄생케 했으며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이자 오늘날에도 바스 노르망디의 주도로 자리 잡은 캉이 대표적인 도시일 것입니다.


정복왕 기욤이 태어난 활래즈는 노르망디 지역의 시장경제를 선도한 도시였습니다.


정복왕의 서사시로 알려진 태피스트리(자수) 박물관이 위치한 바이유는 11세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기독교 문명권의 중심지였습니다.


리샤르 1세와 2세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훼깡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답사지로 각인될 만큼 기독교 문명의 성소였죠.


또 이 두 사람에 의해 바닷가 바위산에 세워진 수도원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교회가 새로이 들어서고, 한적한 바닷가 돌산 위에 느닷없이 들어선 새로운 성지에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몽생미셸은 가톨릭의 성지로 각광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1세기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는 명실공히 캉이었습니다. 캉에 세워진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와 아베이 오좀므(Abbaye aux Hommes)는 캉 요새와 함께 이 도시의 3대 문화유산으로 손꼽힙니다.


캉에 세워진 <아베이 오담므(Abbaye aux Dames)>와 <아베이 오좀므(Abbaye aux Hommes)>


13세기 초에 바이킹의 족적과도 같이 사라진 노르망디 공국은 그러나 이 아련한 지도 한 장만으로 평가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바다 건너 영국까지 점령하였으며, 대서양을 돌아 지중해에까지 이르러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했으니 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만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한 장의 지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타래같이 서로 이어진 무수한 길들을 보여주며 그 길들을 걸어갈 것 또한 권유합니다.


처음 길에 들어서면 되돌아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서로 뒤엉킨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역사의 시간을 여행한다는 것은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종이로 제작된 한 장의 지도를 들고 떠나는 여행에는 그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 가리비 조개를 프랑스어로 야고보 성인이라 부르는 것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이베리아반도로 옮겨질 때 유해를 싼 염포에 가리비 조개껍질이 붙어있어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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