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71화
[대문 사진] 루앙 대성당의 첨탑
루앙에는 클로드 모네가 그린 대성당이 있고 대성당 안에는 노르망디 왕국을 처음으로 건설한 바이킹의 우두머리 롤로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이제야말로 명실공히 노르망디 왕국의 수도이자 그 시조라 할 수 있는 롤로의 무덤이 안치된 루앙으로 떠날 차례다.
파리에서 루앙까지는 기차로 가게 되면 파리 생 나자르 역에서 출발하여 베르농-지베르니를 거쳐 루앙까지 2시간 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동차로 먼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파리를 출발하여 세르지-퐁투아즈를 지나면, 루앙까지 곧게 뻗은 국도가 시원하게 이어지면서 벡쌍의 풍요로운 들판을 달리는 동안 마음마저 상쾌해지면서 몸마저 가벼워지기에 나는 줄곧 이 길만을 택하여 루앙을 다녀오곤 했다.
화창한 봄날에 달리는 국도변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테고, 그러나 지금은 12월 해양성 기후에 갇힌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대낮인데도 비구름이 온 들판을 축축이 적셔가고 있다.
연초록 싹을 틔운 지 오래된 밀들은 이제 싱그러운 초록으로 들판을 가득 채워가면서 수학할 때만을 기다리는 사탕무밭 또한 진초록으로 물들어간다. 그래서 벡쌍의 풍요로운 구릉길마저 들판처럼 한 겨울에도 얼어붙는 법이 없다.
해양성기후로 말미암아 한 겨울에도 밀이 파랗게 자라는 이 비옥한 땅을 처음으로 목격한 바이킹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만일 칸의 후예들인 몽골인들이 이 땅을 발견했다면 모두 다 목초지로 바뀌었을까?
9세기말에 바이킹의 우두머리였던 롤로는 이와 같은 땅을 탐냈을 것이고, 프랑스 왕국의 국왕 샤를 또한 절대 이 땅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협약(조약)을 맺고 엪트 강을 경계삼아 두 왕국이 나란히 공존하는 지혜를 선택했을 게 분명하다.
대서양을 낀 노르망디만으로도 롤로는 더없이 다행이다 싶었을 것이다. 대서양 서쪽지역을 빼앗긴 샤를로서도 더 이상 파리를 공격당할 걱정을 덜었음은 물론, 파리로부터 8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샤르트르가 위험에 처할 일도 없게 된 탓에 두 다리 쭉 뻗고 잠들 수 있었으리라.
이 두 사람이 911년에 체결한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은 엪트 강을 낀 생 클레흐 마을에서 성사되었다. 하여 911년 이후로 3백년 동안 엪트 강 너머로 대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은 바이킹들에 의해 노르망디 왕국으로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세르지 퐁투아즈를 지나 루앙으로 향한 길은 그처럼 생 클레흐 쉬흐 엪트 마을을 관통하고 있었다.
벡쌍 숲을 지나 곧게 뻗은 길은 곧장 루앙으로 향한다. 길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마을이 생 클레흐 마을이고 루앙에 거의 다가와서 지나치게 되는 마을은 흘뢰리 쉬흐 앙델(Fleury Sur Andelle)이다.
주민이 2천 명이 채 안 되는 흘뢰리 마을은 루앙으로 곧장 뻗어나간 도로가 갑자기 낭떠러지 밑으로 고꾸라지듯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굽잇길을 돌아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지형적으로 높고 낮은 구릉과 마을의 대비가 선명한, 그래서 전란이 있을 때마다 많은 고초를 겪었음직한 마을은 생각보다 기품 있고 우아하다.
내가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란 나라는 다른 유럽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마을마다 문장을 지니고 있으며, 나름대로 마을마다 간직하고 있는 특색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흔한 고층아파트 한 채 없는 아주 고색창연한 시골마을의 특징을 여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붉은빛의 낡은 벽돌건물에서 생활하려면 얼마나 비좁고 고달플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와집을 끝까지 고수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이들은 이들대로의 삶의 철학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흘뢰리 마을의 문장은 파란 바탕에 상단에는 두 개의 별과 하단에 다섯 개의 불꽃모양이 디자인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보듯이 인터넷사이트 상에서는 문장을 좀 더 세련되게 디자인한 것 역시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