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74화
[대문 사진] 루앙 대성당 서쪽 파사드
롤로는 이미 천 년 전에 세상을 뜬 역사의 인물이다. 항간에서는 그의 무덤이 실제가 아니라 후세인들이 만들어 놓은 상징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사실이다. 8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해가 932년, 루앙 대성당은 역사의 부침 속에 파괴되고 개축되어 오늘날의 외형을 띠게 된 것은 15세기 때의 일로 그의 석관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롤로의 무덤이 장식이든 상징이든 하여간에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은 911년에 루앙의 백작이 된 그의 흔적을 찾아온 사람들일 테고, 어떡하든지 롤로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일 터이니, 루앙 대성당이 ‘가공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 역시 그렇듯 가공된 역사를 찾아 이곳까지 흘러든 여행객에 불과하지 않은가?
남쪽 파사드를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두컴컴한 텅 빈 허공 속에 북쪽 장미창이 시선을 압도한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간구하면 하느님께서는 영롱한 빛을 통해 기도에 응답한다는 것이 중세 기독교 관이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배운 중세 기독교 관이 그러했다. 고딕이전에 로마네스크가 교회건축을 담당해 왔지만, 그 간결하면서도 벽이 두꺼운 육중한 건축물이 벽이 얇아지면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건축양식으로 바뀐 것은 오로지 프랑스 인들의 신앙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건축술이었다. 세속 안에 천국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들만의 생각이 그 같은 건축술을 통해 그들의 숭고한 신앙심을 표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열풍처럼 번진 대형교회 건설사업도 한편으로 보면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대형교회들 역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그건 분명히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개혁 이후로 예수의 살아생전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나선 개신교 신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고딕 대성당을 20세기에 흉내 낸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속세에 천국을 구현하겠다는 믿음만큼은 숭고할지라도 21세기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좁은 땅에 대형교회를 건설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허망한 세속적 욕망의 덩어리에 불과한 웅대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발상은 오히려 신앙인의 종교에의 순수한 열정을 감퇴시키는 요인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도올 김용옥의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서 도올이 내린 결론 무(無)의 개념이나 그 허망함의 덧없음에 대한 자각과는 달리 기독교는 분명 현세에서 천국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종교였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도 험난한 길인지를 조각상들과 색유리창에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극명하게 제시했던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다.
덧없음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일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 한다면, 천국을 향한 신앙인들의 발걸음은 착하고 바르게 살려 노력하며, 또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매진하는 일에 있었다.
이 세상 어느 현자가 악하게 살면서 나와는 다른 이들을 살해하고 고문하고 씨를 말리라고 설법했겠는가? 그럼에도 21세기 역시 성서속의 풍경처럼 악이 승리하고 지배하는 살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착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은 저 기원전부터 박해받고 핍박받고 내몰림 당한 뿌리 뽑힌 유대인들처럼 오늘날에도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에 불과하다.
그들을 위한 성전이 12세기에 프랑스라는 비옥한 땅에서 건축으로 탄생한 것이 고딕이요, 15세기에 다시 고딕이 거대한 불꽃의 형태로 타오른 건축술이 화염양식이다.
마치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 신앙인의 가슴을 흥건히 적신 선(착함)에 대한 지향, 바르고 곧게 살려는 삶의 의지는 건축적으로 촛불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으로 구현되기에 이룬 것이다.
불교가 좌우의 정적인 심연에 기초해 있다면, 기독교는 상하 수직적 상승에 그 원리가 담겨있다. 이런 도식적 접근보다는 십자가가 훨씬 더 의미심장한 상징적 은유로 작용한다. 십자가는 상하 좌우를 가르는 나무막대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교차하는 지점 한가운데에 예수가 알몸으로 못 박혀 있는 것은 은유를 넘어선 상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마치 팔을 벌린 우리 몸의 한가운데에 우리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듯이 가톨릭의 십자가는 나무막대기 한가운데에 알몸을 한 예수의 성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심장은 고통에 떨고 고난에 찌들고 삶의 역경과 고비마다 찾아오는 고단함에 쪼들리다가도 어느 순간 신비에 접하자마자 선홍빛 색조로 붉게 타오른다. 아폴리네르의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오는 법”(「미라보 다리」)이라는 시구는 이렇듯 거의 성서적 아포리즘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