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35화
[대문 사진] 로크브륀 캎 마르탱
대서양 생 발레리 앙 꼬 마을에서
지중해 마을 로크브륀 캎 마르탱에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오두막을 떠올리다.
건축은 예술의 종합이라는 말이 있다. 건축가는 종합예술가다. 르 꼬르뷔지에는 이런 정의에 딱 어울리는 건축가다. 이론, 설계, 회화, 디자인, 건축, 문학, 정치를 오간 20세기 건축가는 지구를 누비면서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를 꿈꿨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살던 집은 거대한 콘크리트 숲으로 뒤덮인 꿈꾸던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바닷가의 오두막집이었다. 마지막까지 세상을 항해하다 죽은 것도 아니고 오두막 앞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오두막 뒤편 지중해가 바로 보이는 언덕 공동묘지에 자리 잡았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이본느 르 꼬르뷔지에와 함께 잠들어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입체파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 활동을 했던 젊은 모더니스트는 입체주의를 버리고 순수주의로 방향을 선회하고 철근과 콘크리트에 매료되어 세상 온 도시를 재개발하여 초고층 건물들로 꽉 채우기를 염원했다. 그래서였는지 그의 무덤도 콘크리트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세기의 건축가는 현대 건축의 파르테논을 시도한 것일까?
죽는 날까지 르 꼬르뷔지에는 20세기 공학에 의거한 대도시 재개발에 목말라했다. 그러한 갈증은 무솔리니와 조우하게 만들었고 나치 점령하의 친독 비시정부의 도시계획위원회의 위원을 거쳐, 프랑스 도시 재개발계획에 참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역사는 그를 정치적으로 심판하지도 명성을 깎아내리지도 않았으며, 재산을 몰수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명성을 더해갔다. 세계 도처를 여행하면서 그 만의 독특한 건축 이론을 쉴 새 없이 선전하고 다녔다.
그는 마흔여덟이라는 늦깎이에 결혼을 했다. 1930년에는 프랑스 국적도 취득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죽자 세상 모두가 애도했다. 미국이 조의를 표했으며, 소련은 ‘현대 건축의 가장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고 통곡했다. 일본 역시 그가 남긴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오마쥬(죽은 자를 위한 추도식)를 방영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스위스-프랑스어로 샤를르 에두아르 쟈느레 그리이다. 르 꼬르뷔지에란 이름으로 바꾼 것은 할아버지 영향 탓이 크다. 할아버지 이름은 르꼬르베지에였다. 까마귀를 상징하는 르 꼬르뷔지에란 이름은 독창적이면서도 혁신적이고 지성적이면서 선동(프로파간다)적인 의미를 간취한 것이다.
그는 항상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건축과 예술 그리고 문화의 혁신을 의도했다. 그러나 그의 사고와 이론은 철저하게도 고전적 개념과 정의에 기초해 있었다. 생전의 목소리를 들은 바 없지만, 그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달변가였던 건축 예술 이론가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스스로 혁명적이기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정신 세계는 19세기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
필로티, 파사드, 모뒬로르, 가구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20세기 건축가는 막세이(Marseille)와 피르미니(Firminy)에 다가구 공동주택을 건설했다. 건물 전체가 지상에서 일정 높이 들어 올려진 이 기상천외한 건축물이 차례차례 들어설 때마다 프랑스에서 르 꼬르뷔지에는 도시 재개발 수립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논리를 수립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오스만 식 재정비와는 차원이 다른 도시 재개발을 의도한 그에게는 그러나 절대 권력이 뒷받침되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인근의 위성도시 라데팡스는 그의 오랜 염원의 실험장이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생각과 꿈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계적으로 급진적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그의 종교관이 급선회하여 롱샹 천주교회(성당)을 건축한 점이다. 앙리 마티스의 종교와 건축의 신성한 결합을 방불케 한 이 종교 건축물은 그의 예술세계를 한층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자는 건축이고 소파는 부르주아”라고 설파한 르 꼬르뷔지에는 한적한 지중해변의 이름도 낯선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공동묘지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생전의 거장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연 150만을 웃도는 방문객들은 오직 그의 무덤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르 꼬르뷔지에라 불리는
샤를르 에두아르 쟈느레
여기 잠들다
1887년 10월 6일 태어나
1965년 8월 27일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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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브륀 캎 마르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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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의 이름이
쟌느 빅토린느 걀리였던
이본느 르 꼬르뷔지에
여기 잠들다
1892년 1월 1일 태어나
1957년 10월 5일 파리에서
사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