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36화
[대문 사진] 프로방스 방스(Vence) 성당 입구
생 발레리 앙 꼬에서
앙리 마티스가 디자인한
방스 로사리오 성당을 추억하다.
어느 가을날이었다고 하자. 앙리 마티스는 20세기 초 야수파의 거장답게 오직 노란빛과 연둣빛 그리고 하늘빛, 이 세 가지 색조만으로 천상의 공간을 빚어냈다. 색채의 마술사다운 절묘한 색조의 배합으로 태양(신)의 빛과 자연(대지)의 빛 그리고 지중해안가의 하늘의 색조로 채색된 색유리창이 완성되었다.
가을날 하루 종일 나는 이 순연의 빛으로 채색된 ‘방스 로사리오 성당(Chapelle du Rosaire de Vence)’을 그리고자 분주했다. 그러나 내가 그린 것은 저 칠순의 노인네가 최상의 예술언어로 표현한 창조물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위치한 한 조그만 마을 방스(Vence)에 앙리 마티스가 체류한 것은 지병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를 극진히 보살핀 모델이자 간호사였던 자크 마리란 처녀는 후일 어떤 부름을 받았는지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칠순을 넘긴 마티스가 어떤 성스러운 부름을 받은 탓일까? 수녀가 된 젊은 여인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마티스에 의해 새롭게 장식된 교회가 방스의 로사리오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노란색과 연두색 그리고 하늘색으로만 채색된 유리창과 성찬식 때의 누르스름한 빵을 상징하는 프랑스 남부 갸르(Gare) 지방에서 채석한 돌로 만든 제단, 그리고 오로지 선만으로 이루어진 벽화에서 화가가 꿈꾼 천상을 향한 꿈을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실제 마티스는 방스에 위치한 ‘꿈(Réve)’이란 집에서 기거했다.
“이 교회 건물은 내게 지난 4년간 딴 일에 정신 팔지 않고 오로지 교회를 짓는 일에만 매달릴 것과 또한 생전에 교회가 완성될 것을 엄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러했기에 미비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교회를 내가 제작한 최고의 걸작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골몰했던 앙리 마티스의 예술에의 총화는 마침내 종교 건축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1954년 11월 3일 편안히 눈을 감았다. 일찍이 앙드레 드랭과 블라맹크와 함께 색채의 거친 사용으로 ‘야수적인 색조’라는 평을 얻은 바 있는 야수파의 시조는 콜리우르(Colliour)를 거쳐 니스(Nice)에 안착하기까지 오히려 단순한 색조에서 우러나오는 성스러운 색의 대비에 몰두했다.
“단순화를 위한 줄기찬 노력 끝에 몇 가지 색채로 환원된 그의 그림은 그 색들이 서로 부르고 화답하며 노래를 부르는 그림”이라고 평했던 르네 슈보프 역시 단순화를 위한 화가의 조화로운 조형언어의 실험에 주목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색채로 뒤덮인 화폭에서 성스런 예술에의 감동에 이끌리는가? 마티스는 제한된 색의 적절한 대비를 통하여 저 심오한 종교적 심연에까지 우리를 이끌고 있다. 색이 부족해서 그림이 비속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형태와는 동떨어진 엉성한 형태에 물감을 뒤덮는 식의 치졸한 화면구성은 가끔 화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치기는 오히려 예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신념이 지나쳐 색종이 오리기 기법(콜라주)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색의 근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내면에의 예술창작에 대한 의지가 그와 같이 가위에만 의존한 색의 배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교회를 그렸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레빌르 교회」나, 반 고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또는 조르쥬 브라크는 바랑쥬빌 교회 유리창에 빛의 색조를 입혔다. 샤갈 역시 메츠와 랭스 대성당의 유리창에 색을 입혔다. 앙리 마티스는 화폭 위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건축하고 장식한 것이다. 성직자석, 성수반, 성직자들의 장식품, 미사용구에 이르기까지 교회 전체를 설계한 그의 예술적 재능은 20세기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재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부로 넘보아서 될 일도 아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한 젊은 여인이 죽음을 눈앞에 둔 화가에게 간청한 부탁이 거룩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종교로 승화된 이 색조는 천상과 지상과 영혼을 감싸 안은 참으로 명료하고도 절묘한 표현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오늘 그 교회 앞에서 성호를 긋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예술과 종교의 저 따뜻한 입맞춤에 대하여! 20세기 르네상스가 바로 그것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