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39화
낯선 바다가 낯익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무심히 내리쬐던 봄 햇살의 잔광마저 사라지려는 찰나 저녁 식당을 찾아들어 양갈비를 먹을까 해물 모듬요리인 후뤼 드 메흐(Fruit de mer)를 시킬까 고민하다가 겨울에는 역시 해물 요리가 백포도주에 어울릴 듯싶어 바닷물이 흥건하게 얼음 쟁반에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 어둑해진 바다를 바라보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으나 혼곤한 의식은 결국 새벽에 잠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30여 분 동안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대다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리창 앞에 앉아 멍하니 멀리 완전히 침몰한 밤바다를 바라보다가 늘 끼고 다니는 여행수첩을 꺼내 들었다.
펼친 수첩에는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에 대한 단상이 생경한 탓인지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듯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들라크루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La liberté guidant des peuples)」에서 1830년 7월 27일, 28일, 29일 3일간 발생한 시민이 주체가 된 7월 혁명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인들이 흔히 영광의 3일이라고 일컫는 7월 혁명은 그러나 실패한 시민혁명으로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군주제를 무너뜨리고자 시민이 주체가 된 혁명의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주제를 더욱 공고히 한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루이 필립이라는 새로운 군주를 옹위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이런 혁명적 상황 전개와는 달리 오로지 영광의 3일 동안 있었음직한 상황만을 다루고 있다. 삼색기를 들고 있는 자유(La liberté라는 단어가 여성형임에 주의하면 수호자의 모습을 한)가 모든 계급의 민중을 이끌고 있는 역동적인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수호자 바로 오른쪽엔 귀족계급을 상징하는 사내(화가 자신이라는 설도 있다)가, 왼쪽으로는 몽마르트르를 떠도는 한 아이(파리의 서민들이 산다는 언덕 마을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가 등장한다. 이 3명의 주인공 뒤로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들인 민중들이 우르르 앞을 향해 뛰어들 기세다.
3명의 주인공 앞으로 쓰러져 죽은 정부군들의 시체와 바리케이드를 막 넘어선 혁명의 역동적 상황은 그림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왼쪽(그림을 바라볼 때 오른쪽) 멀리 배경으로 자리 잡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높이 70미터에 이르는 두 종탑은 혁명이 수도 파리에서 일어났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또한 평면적으로 그림에서의 상황 전개는 부서지고 무너진 바리케이드가 파리 시가지 곳곳에 설치되었음을 증거해준다.
총으로 무장한 정부군, 그들은 대포까지 동원하여 혁명의 파리 시민들을 살육했지만, 그림에서만큼은 그와 같은 처절한 피비린내가 풍겨지지 않는다. 화가 들라크루아는 그러나 비겁하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당당히 왼쪽 바리케이드 위에 ‘들라크루아 1830’이란 서명을 남김으로써 혁명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더하여 자유의 수호자가 들고 있는 삼색기(성화가 아닌 프랑스 국기)를 그려 넣은 것은 진정으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가 프랑스 사회에 구현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다름 아니다. 이 묵시적 선언은 분명 1830년 7월 혁명의 상황은 프랑스 국가이념이기도 한 자유 평등 박애가 구현되지 않고 있는 상황임을 역설적으로 환기시켜준다.
그림에서 눈에 띄는 숫자는 3이다. 3의 상징은 주인공이 셋이고 혁명도 3일간 발생했으며,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 안의 국가이념도 자유 평등 박애 셋이란 점에서 선명해진다. 3은 또한 혁명 이전의 계급인 성직자 계급, 귀족 계급, 평민 계급을 암시한다. 3을 아우르는 7월 혁명의 진정한 뜻은 “모두가 하나 되어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귀족 부르주아를 꿈꿨던 화가 들라크루아, 재능이 넘쳤던 작가는 프랑스 회화사에서 가장 낭만적 주제에 천착했던 그 시대의 댄디였다. 들라크루아는 후일 7월 혁명에 적잖이 실망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그림에서만큼은 혁명에 회의하고 있는 작가의 고뇌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금 앞선 시기에 프랑스 화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37살의 나이에 요절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 영감을 받아 「단테의 배」로 화려하게 화단에 등장한 들라크루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 이전에 앗시리아 군주를 소재로 하여 바이런이 쓴 시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폭력과 광기’로 패러디화한 「군주 사르디나팔의 죽음」이라는 대작을 완성함으로써 문학적 상상력과 함께 이국적 취향이 빚은 새로운 화풍을 등장시킨 진정한 낭만주의 화가로 발돋음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였던 샤를 보들레르라는 상징주의 시인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들었던 들라크루아의 상상력은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자크 루이 다비드와 앵그르, 나폴레옹 시절 활동했던 장 그로 등이 확립한 신고전주의 화풍과 역사화의 경계를 무너뜨린 낭만주의 최고의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만든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분명한 건 거의 대부분이 신고전주의적 질서와 귀족적 취미, 우아한 세계에 머물렀던 반면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경계를 넘어서서 ‘혁명’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만큼은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소재주의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1830년대의 상황에서는 가장 혁명적이고 진취적인 사건 중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대 인식은 혁명에 대한 참여의식으로 더욱 고조되어 아름다운 세계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광기의 고발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군주 사르디나팔의 죽음」에서 「키오스의 학살」로 이어지는 들라크루아만의 세계 인식이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했다 할지라도 「민중을 이끄는 자유」보다 먼저 제작한 「군주 사르디나팔의 죽음」은 인간 본성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와 폭력이 어떻게 사회화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
이런 선상에서 경계에 놓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가장 경계다운 작품이자 그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려는 작가의 시대인식에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과연 누가 혁명의 언어로 시대를 회화화하고자 노력했던가? 굳이 예를 들자면, 스페인에 고야라는 화가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고야는 시민혁명을 그림 속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 제국의 광기에 희생당한 스페인 시민들의 명예로운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끌어들였을 뿐이다.
이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들라크루아의 혁명에의 열기는 그림을 차고 넘친다. 작가가 미처 깨닫지 못한 혁명에의 열기는 시대를 건너뛴 21세기에조차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전 세계의 예술가들에게 혁명의 정당성과 위대한 승리의 주역인 ‘시민’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진정한 시민이라 불리는 민중에 대한 자각으로 말미암아 그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과 혁명이란 각각의 개념을 한데 긴밀하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참으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암울했던 19세기의 상황에서 들라크루아는 가장 진보적인 언어였던 색채를 통해 혁명을 이야기하고 들려주고자 하였다. 과연 이만한 진보적이고도 진취적인 작가가 그 시대에 존재했다는 말인가? 과연 그 시대에 어느 작가가 새로운 시대에 목말라했다는 말인가? 과연 어느 예술가가 시민 즉,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를 의도했다는 이야기인가?
떠오르는 기억 하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는 한참 동안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서 시선을 뗀 경우는 누군가 내게 와서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전시실 방향을 물었을 때뿐이다. 새로운 주제전이 개최될 때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이제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한번 복사해 보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혁명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풍경화가 아니라 인물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이 기록화는 또한 정밀하게 혁명의 작중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묘사해야 한다는 버거움이 한순간 그림 그리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대체 나는 왜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복사하려 한 것일까? 무슨 이유로 그의 그림을 그것도 굳이 노트에 옮기려 한 것일까? 순간 갑자기 끼어든 회의로 말미암아 연필을 쥔 손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것은 무리다. 19세기 기록화를 굳이 21세기에 되풀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회의가 일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먼저 그림에 닿아가고 있었다. 결국 예술과 혁명에 대한 생각이 다시 연필을 쥔 손에 힘을 가했고, 그림 정 중앙에 위치한 자유를 그리게 부추겼으며, 맨 마지막엔 발치에 쓰러져 죽은 정부군의 시체까지도 묘사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색을 입힐까 하다가 그냥 소묘로 남겨두기로 했다. 색을 입힌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색기는 분명 3가지 선명한 색 파랑 하양 빨강이 의도하는 것이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 그것은 오직 3가지 색상에 의해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삼색기만큼은 색을 입히기로 작정했다. 처음엔 자유를 그리고 박애를 색칠함으로써 자연 평등이 이루어졌다. 흰색은 투명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그 흰색도 채워 넣었다. 흰색이 반드시 투명하지마는 않다는 사실을 혁명의 포연은 이야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역시 이 하양이 투명한 상태는 아니었다. 흰 천은 혁명의 포연 속에 얼룩져 보이기도 했고 또한 그 의미처럼 순수한 백색 상태이기도 했다. 투명한 흰 새의 바리에이션은 평등의 여러 의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동이 터 오르고 있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느낌이다. 이른 시간부터 어디로 산책 나갈 일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애달픈 삶을 산 지도 어언 30년이 되었다. 이 미련하고도 애달픈 삶을 누군가에게 고백할 길도 마땅찮은 걸음걸이는 아직 새벽인데도 자꾸만 동터오는 바닷가에서 비척이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