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73화
10개의 조명쇼가 들려주는 도시의 역사
2015년부터 퐁토드메흐(Pont-Audemer)의 생투앙(Saint-Ouen) 교회는 광범위한 복원 프로그램의 역사적 건축물에 선정되었다. 길고 긴 복원작업이 끝나자 이를 축하하고 새 단장을 마친 교회 외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 당국은 비디오 조명쇼를 주민들께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멀티미디어 기술을 이용하여 빛이나 비디오를 볼륨에 투사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에 대규모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었기에 2019년 12월 2주 동안 48회 상영을 통해 12,700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그들을 매혹시킨 인상적인 스펙터클을 펼칠 수 있었다.
이 스펙터클을 통하여 퐁토드메흐에서 태어나 자란 브뤼노 퓨츌류(Bruno Putzulu)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는 10개의 멋진 애니메이션 프레스코 화를 통해 교회와 도시의 역사를 재밌게 들려주었다.
마을의 첫 번째 흔적은 지명에 해당하는 Pont-Audemer에서 읽을 수 있다. 지명이 가리키듯 갈로 로마 시대에 로마 가도 위에 세워진 두 개의 다리를 일컫는 퐁토드메흐는 갈리아를 평정한 고대 로마제국 하의 군사기지로 탄생한 도시다. 그 후 마을은 라틴어로 ‘ad duos Pontes(two bridges)’라는 지명이 일컫듯 두 개의 다리를 갖게 되었다.
몇 세기 후, 게르만 출신의 카롤링거 백작인 알데 마루스(Aldemarus)는 스칸디나비아 인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고 Pont-Audemer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Pons Aldemari라는 폐허가 된 다리를 재건했다.
9세기 동안 이 지역은 바이킹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다. 이러한 공격에 지친 프랑스 국왕 샤를 3세는 생 클레흐 쉬흐 엪트(Saint Clair sur Epte) 조약에서 퐁토드메흐(Pont-Audemer)가 속한 루앙(Rouen) 주교좌 영지를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의 수장인 롤로(Rollo)에게 양도한다. 그 대가는 더 이상 프랑스 영토를 침입해서는 안 되고 롤로 자신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었다. 롤로의 충직한 동료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르 다누아(Bernard Le Danois)는 보상으로 퐁토드메흐 도시를 롤로로부터 하사 받았다.
퐁토드메흐의 영주였던 베르나르 르 다누아가 죽자 그의 아들인 토흐프 르 리슈(Torf Le Riche)가 이를 계승한다. 11세기에 퐁토드메흐의 영주들은 카르멜(Carmel) 언덕의 릴(Risle) 우안 강둑에 성을 지었다. 성의 일부는 갈르랑 2세(Galeran II de Meulan)가 지었고 다른 나머지 부분은 토르프의 손자인 옹프롸 드 비에이유(Onfroy de Vieilles)가 완성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였던 이유로 마을은 정복왕 기욤(위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할 시기에 60척의 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생투앙(Saint-Ouen)에게 봉헌한 로마네스크 양식에 기초한 교회 초석이 놓였다.
퐁토드메흐가 번영을 구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릴(Risle) 강의 가장 좁은 지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릴 강 주변은 물, 숲, 가축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많은 수공업 장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무두질 작업장을 만들었다. 퐁토드메흐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퐁토드메흐의 주교 좌 성당이었던 생투앙(Saint-Ouen) 교회는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확장되어야 했지만,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여 개축 사업이 연기되는데, 그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결국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갈등은 도시를 풍비박산시키고 말았다. 뒤누아와 모르탱 백작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1449년 8월 8일 에브뢰를 떠나 퐁토드메흐를 습격하여 420명의 영국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은 종막을 고했다.
전쟁이 끝나자 교회는 마침내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내진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로마네스크 시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트란셒트(transept)와 성가대석만이 남게 되었다. 포털, 북쪽 타워 및 남쪽 타워의 기초 건설은 미셸 고이에(Michel Gohier)의 지시에 따라 1485년경에 시작되었다.
자재 부족으로 인해 공사가 주기적으로 중단되었다.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던 남쪽 타워는 새롭게 장식을 덧붙였으며, 외관의 한 층을 덮어 생투앙 성당의 외부와 내부를 조화롭게 연결시켰다.
작업은 토마 테훌드(Thomas Theroulde)의 지시에 따라 16세기 초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신, 구교도들 간에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인해 건축 공사는 또다시 중단되었고 이후로 공사는 더 이상 재개되지 않았다.
도시 경제가 번성하면서 마을에는 아름다운 목조 주택이 들어서고, 이러한 유형의 건축물 외에도 17세기에는 흰 석재와 반 목조 바닥이 있는 벽돌 건물이 추가로 등장했다.
18세기에 진입하면서 도시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대규모 영어 커뮤니티가 정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19세기에는 무두질 공장과 제지 공장이 두 가지 주요한 산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20세기 초에는 주조 공장이 이를 뒤따랐다.
20세기에 벌어진 양차대전 동안 도시와 교회는 산산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퐁토드메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군대에 엄청난 양의 양(洋) 가죽을 공급하여 전쟁 물자를 확충하려는 노력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차례의 폭격이 감행되어 도시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폭격을 당했는데, 천만다행인 것은 악천후 덕분에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폭탄은 도심에서 벗어나 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퐁토드메흐는 1944년 8월 26일 생투앙 축일에 마침내 해방되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직 발명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어지는 그림처럼 그들이 상상한 미래를 살아갈 주인공들입니다. 미래를 열어가는 퐁토드메흐를 만나보세요. [1]
[1] 퐁토드메흐(Pont-Audemer) 시청 홈페이지 문화유산 항목 생투앙 성당 조명쇼 스펙터클에 관한 기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