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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Apr 11. 2024

조명쇼가 펼치는 도시의 역사

몽생미셸 가는 길 173화


10개의 조명쇼가 들려주는 도시의 역사



2015년부터 퐁토드메흐(Pont-Audemer)의 생투앙(Saint-Ouen) 교회는 광범위한 복원 프로그램의 역사적 건축물에 선정되었다. 길고 긴 복원작업이 끝나자 이를 축하하고 새 단장을 마친 교회 외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 당국은 비디오 조명쇼를 주민들께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멀티미디어 기술을 이용하여 빛이나 비디오를 볼륨에 투사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에 대규모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었기에 2019년 12월 2주 동안 48회 상영을 통해 12,700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그들을 매혹시킨 인상적인 스펙터클을 펼칠 수 있었다.


이 스펙터클을 통하여 퐁토드메흐에서 태어나 자란 브뤼노 퓨츌류(Bruno Putzulu)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는 10개의 멋진 애니메이션 프레스코 화를 통해 교회와 도시의 역사를 재밌게 들려주었다.


릴(Risle) 강둑에 건설된 퐁토드메흐(Pont-Audemer)는 번영을 구가하면서 역사와 전설을 오가는 도시가 되었다.


Ad duos Pontes, 최초의 갈로-로마 흔적


마을의 첫 번째 흔적은 지명에 해당하는 Pont-Audemer에서 읽을 수 있다. 지명이 가리키듯 갈로 로마 시대에 로마 가도 위에 세워진 두 개의 다리를 일컫는 퐁토드메흐는 갈리아를 평정한 고대 로마제국 하의 군사기지로 탄생한 도시다. 그 후 마을은 라틴어로 ‘ad duos Pontes(two bridges)’라는 지명이 일컫듯 두 개의 다리를 갖게 되었다.


몇 세기 후, 게르만 출신의 카롤링거 백작인 알데 마루스(Aldemarus)는 스칸디나비아 인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고 Pont-Audemer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Pons Aldemari라는 폐허가 된 다리를 재건했다.


바이킹의 침입 및 프랑스 국왕 샤를과 바이킹의 수장 롤로 간에 협약을 맺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다룬 조명쇼.


9세기 동안 이 지역은 바이킹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다. 이러한 공격에 지친 프랑스 국왕 샤를 3세는 생 클레흐 쉬흐 엪트(Saint Clair sur Epte) 조약에서 퐁토드메흐(Pont-Audemer)가 속한 루앙(Rouen) 주교좌 영지를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의 수장인 롤로(Rollo)에게 양도한다. 그 대가는 더 이상 프랑스 영토를 침입해서는 안 되고 롤로 자신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었다. 롤로의 충직한 동료 중 한 명인 베르나르 르 다누아(Bernard Le Danois)는 보상으로 퐁토드메흐 도시를 롤로로부터 하사 받았다.


생투앙(Saint-Ouen) 교회 건설


퐁토드메흐의 영주였던 베르나르 르 다누아가 죽자 그의 아들인 토흐프 르 리슈(Torf Le Riche)가 이를 계승한다. 11세기에 퐁토드메흐의 영주들은 카르멜(Carmel) 언덕의 릴(Risle) 우안 강둑에 성을 지었다. 성의 일부는 갈르랑 2세(Galeran II de Meulan)가 지었고 다른 나머지 부분은 토르프의 손자인 옹프롸 드 비에이유(Onfroy de Vieilles)가 완성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였던 이유로 마을은 정복왕 기욤(위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할 시기에 60척의 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생투앙(Saint-Ouen)에게 봉헌한 로마네스크 양식에 기초한 교회 초석이 놓였다.


중세에 퐁토드메흐는 번영을 구가한다.


퐁토드메흐가 번영을 구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릴(Risle) 강의 가장 좁은 지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릴 강 주변은 물, 숲, 가축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많은 수공업 장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무두질 작업장을 만들었다. 퐁토드메흐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백년전쟁


퐁토드메흐의 주교 좌 성당이었던 생투앙(Saint-Ouen) 교회는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확장되어야 했지만,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여 개축 사업이 연기되는데, 그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결국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갈등은 도시를 풍비박산시키고 말았다. 뒤누아와 모르탱 백작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1449년 8월 8일 에브뢰를 떠나 퐁토드메흐를 습격하여 420명의 영국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은 종막을 고했다.


미완성인 채 버려진 아름다움, 생투앙 성당


전쟁이 끝나자 교회는 마침내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내진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로마네스크 시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트란셒트(transept)와 성가대석만이 남게 되었다. 포털, 북쪽 타워 및 남쪽 타워의 기초 건설은 미셸 고이에(Michel Gohier)의 지시에 따라 1485년경에 시작되었다.


자재 부족으로 인해 공사가 주기적으로 중단되었다.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던 남쪽 타워는 새롭게 장식을 덧붙였으며, 외관의 한 층을 덮어 생투앙 성당의 외부와 내부를 조화롭게 연결시켰다.


작업은 토마 테훌드(Thomas Theroulde)의 지시에 따라 16세기 초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신, 구교도들 간에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인해 건축 공사는 또다시 중단되었고 이후로 공사는 더 이상 재개되지 않았다.


산업화로의 이행


도시 경제가 번성하면서 마을에는 아름다운 목조 주택이 들어서고, 이러한 유형의 건축물 외에도 17세기에는 흰 석재와 반 목조 바닥이 있는 벽돌 건물이 추가로 등장했다.


18세기에 진입하면서 도시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대규모 영어 커뮤니티가 정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19세기에는 무두질 공장과 제지 공장이 두 가지 주요한 산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20세기 초에는 주조 공장이 이를 뒤따랐다.


양차 대전에 직면한 도시의 운명


20세기에 벌어진 양차대전 동안 도시와 교회는 산산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퐁토드메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군대에 엄청난 양의 양(洋) 가죽을 공급하여 전쟁 물자를 확충하려는 노력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차례의 폭격이 감행되어 도시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폭격을 당했는데, 천만다행인 것은 악천후 덕분에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폭탄은 도심에서 벗어나 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퐁토드메흐는 1944년 8월 26일 생투앙 축일에 마침내 해방되었다.


퐁토드메흐(Pont-Audemer)의 미래.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직 발명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어지는 그림처럼 그들이 상상한 미래를 살아갈 주인공들입니다. 미래를 열어가는 퐁토드메흐를 만나보세요. [1]






[1] 퐁토드메흐(Pont-Audemer) 시청 홈페이지 문화유산 항목 생투앙 성당 조명쇼 스펙터클에 관한 기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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