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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Apr 06. 2024

꽃 피는 봄날에

몽생미셸 가는 길 171화


옹플뢰르가 낳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극도의 음울함을 찬란한 시어로 꽃 틔운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온몸이 전율하는 극도의 흥분상태로 빠져드는 것은 시인이 창안해 낸 그만의 독특한 시어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짙게 구름 낀 음울한 날씨에 인적조차 끊긴 시골 목초지 한가운데 들어선 숙박지에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희미한 조명등을 켜고 시를 읽어갈 때면 더욱 격한 감정의 흥분상태에 돌입한다.


이곳은 옹플뢰르 인근의 생 가티앵 데 부아 마을이다. 마을 전체 면적 가운데 주거지역은 10%가 채 안 된다. 58%가 임야고 24%가량이 목초지이니 마을 주거지역을 떠나면 바로 숲이다.


마을을 에워싼 울창한 숲. 숲을 관통한 숲길은 바다 쪽을 향해 나있다.


그래서인지 마을 이름도 ‘숲 가운데 들어선 생 가티엥(Saint Gatien des Bois)’이다. 주민 숫자도 1,330명을 조금 넘는다. 교회 한 채가 이 마을의 유일한 역사 유적이자 문화유산이다. 인근의 공항은 솔직히 나폴레옹 3세 때 조성된 바닷가 휴양지 도빌(Deauville)을 드나드는 부르주아 개인 전용 제트기들을 위한 이착륙장이라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숲 속의 마을’임을 일러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의 로고나 문장 할 것 없이 모두 참나무가 도안되었다.


조용하다 못해 인기척 소리조차 없는 마을 목초지에 들어선 숙박지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하필이면 꺼내 든 시집이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이다. 민음사에서 펴낸 번역 시집은 휴대하기도 편하고 여행 중에 읽으면 새롭기도 하여서 여행할 때마다 가끔 소지하고 다니는데, 하필이면 이날 펼쳐 든 시가 「음울(Spleen)」이다.


프랑스어로 읽으면 시구마다 각운(脚韻)이 리드미컬하게 묘한 울림을 준다. 하나 시 내용은 각운의 반향과는 달리 마치 겨울 유리창에 싸늘한 빗줄기가 줄줄 흘러내릴 때처럼 평안함이 완전히 붕괴되어 고독 속에 불안감만 가중되고 처절하고도 음울한 암울함에 시달리도록 만든다.


음울(Spleen)


오랜 권태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마음 위에

무겁게 내리 덮인 하늘이 뚜껑처럼 짓누르며,

지평선의 틀을 죄어 껴안고, 밤보다도 더욱

처량한 어두운 낮을 우리에게 내리부을 때


대지가 온통 축축한 토굴감옥으로 변하고

거기서 희망은 박쥐처럼 겁먹은 날개로

마냥 벽들을 두들기며, 썩은 천장에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떠돌 때


내리는 비 광막한 빗발을 펼쳐

드넓은 감옥의 쇠 격자처럼 둘러칠 때,

더러운 거미들이 벙어리 떼를 지어

우리 뇌 속에 그물을 칠 때면


별안간 종들이 맹렬하게 터져 울리며

하늘을 향해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나니

흡사 고향을 잃고 떠도는 정령들이

끈질기게 울부짖기 시작하는 듯.


그리곤 북도 음악도 없는 긴 운구차 행렬이

내 넋 속을 느릿느릿 줄지어 가는구나.

희망은 꺾여 눈물짓고 잔인 난폭한 고뇌가

내 푹 숙인 두개골 위에 검은 기를 꽂는구나.


Quand le ciel bas et lourd pèse comme un couvercle

Sur l’esprit gémissant en proie aux longs ennuis

Et que de l’horizon embrassant tout le cercle

Il nous verse un jour noir plus triste que les nuits ;


Quand la terre est changée en un cachot, humide,

Où l’Espérance, comme une chauve-souris,

S’en va battant les murs de son aile timide

Et se cognant la tête à des plafonds pourris ;


Quand la pluie étalant ses immenses trainées

D’une vaste prison imite les barreaux,

Et qu’un peuple muet d’infâmes araignées

Vient tendre ses filets au fond de nos cerveaux,


Des cloches tout à coup sautent avec furie

Et lancent vers le ciel un affreux brûlement,

Ainsi que des esprits errants et sans patrie

Qui se mettent à geindre opiniâtrement.


Et de longs corbillards, sans tambours ni musique,

Défilent lentement dans mon âme ; l’Espoir,

Vaincu, pleure, et l’Angoisse atroce, despotique

Sur mon crâne incliné son drapeau noir. [1]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Fleur du Mal)』에서


생 가티엥 데 부아 마을을 찾았을 때는 4월 초 막 봄꽃이 피기 시작하던 때였다. 노르망디는 연평균 영상 10°C 안팎을 넘나 든다. 겨울엔 춥지만 눈 대신 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도 자주 불며, 한 여름에도 20°C를 맴돌아 써늘하다는 느낌을 준다. 대서양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습하고 음울한 날씨 속에서도 풀들은 자라고 한 겨울에도 초록빛을 띠는 까닭에 마냥 음울하지만은 않다.


노르망디에서 마주한 봄


더군다나 꽃 피는 4월,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들판에 서면 이 땅이 왜 풍요로운 지를 알 것 같다. 노르망디 인들은 브르타뉴 사람들처럼 거칠지도 사납지도 않으며, 바이킹을 선조로 둔 후손들 답게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마냥 상냥하고 친절하기먼 하다.


노르망디가 특히 프랑스적인 이유는 주민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적다는 점도 작용한다. 툭히 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이방인들이 대도시를 놔두고 바닷가까지 찾아와 비싼 임대료에, 지대에, 세금을 감당할 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백인계 프랑스인들이 대부분인 노르망디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모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노르망디 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이방인들이 쉽게 직업을 구할 수 있는 대도시를 포기하고 굳이 시골에 들어앉을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뉴스 저널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생 가티엥 마을만 해도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일반의가 없어 마을 입구 도로가에 “일반의를 구합니다”란 안내표지판이 서있다. 시골에 사는 노인네들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다.


트랙터를 몰고 마을에서 1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도빌의 일반의료원이나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아가는 늙수그레한 농민을 상상한다는 것이 그래서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여행자 주제에 시골 마을을 걱정해야 할 판인 이 절박한 상황은 프랑스 의료체계가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이 먹어 여행할 때마다 늘 뇌리 속에 거미줄을 치고 똬리를 트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봄날의 산뜻한 여행을 위해 모처럼 인터넷으로 호텔방을 예약했다. 호텔은 마을 구석에 자리한 르 끌로 생 가티엥(Le Clos Saint Gatien), 별이 3개씩이나 붙어있는 전형적인 노르망디 리조트 호텔이다. 객실의 일부가 노르망디 지방 특유의 농가를 개조한 꼴롱바쥬 양식으로 지어졌기에 농가와 비슷한 호텔에서 한 번 자보고 싶은 마음이  이 호텔을 예약하게 만들었다.


기와집에서 자고 싶어 시골 민박을 할 때처럼 가끔은 그 지방 특유의 스타일로 지은 집에서 자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예약했는데, 로비나 레스토랑 그리고 내게는 쓸모없는 수영장, 휘트니 센터 등은 현대적이나 통나무로 지은 객실만큼은 몽골의 게르를 연상시킬 만큼 별채로 자리하고 있다. 방 안에 들어서니 우선 눅눅한 습기가 확 끼쳐온다. 4월, 노르망디를 여행하기엔 아직 이른 시기임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호텔 르 끌로 생 가티엥(Le Clos Saint Gatien).


지명에 등장하는 생 가티엥은(Saint Gatien)은 라틴어로 가디아누스(Gatianus) 성인(聖人)을 가리키며 프랑스 중서부 루아르 강가의 도시 투르(Tours)의 첫 번째 주교였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250년경 교황 파비아누스의 위임을 받아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의 투렌 지역을 복음화한 그는 300년경에 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을 기리는 축일은 12월 18일이다.


루아르(Loire) 강가의 도시 투르(Tours)에 세워진 가티엥 성인을 기리기 위한 기념성당.


호텔명 또한 지명을 따왔다. 끌로(clos)라 함은 보르도를 가로지르는 지롱드 강 좌안의 포도밭들에서 보듯 포도밭을 염두에 둔 용어로 ‘울타리 쳐진 밭’을 가리킨다. 과수밭 목초지에 호텔이 들어서서 호텔명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파리를 벗어나는 것만을 꿈꾸던 시절, 어느 화사한 봄날이었다고 하자. 노르망디 지방에 들어서자마자 도로변을 따라 들어선 목초지 여기저기에서 과실수들이 터뜨리는 봄꽃에 취해가던 중 호텔에 도착하니 정원 안에 봄꽃이 가득하다. 봄꽃을 바라보니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다시 봄이 부활한 것이다.




낭만주의 회화, 그 가운데에서도 으젠 들라크루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미술(L’Art Romantique)에 관한 탁월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냈던 샤를 보들레르[2] 역시 파리 생활이 얼마나 지겨웠으면 어머니 고향인 옹플뢰르에서의 여생을 그토록 꿈꿨을까?


마네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조차 지겨워했던 보들레르는 그러나 평생 파리를 맴돌다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점심때마다 보들레르를 식당으로 불러내 밥 사줬던 마네는 그의 장례식 장면을 유화로까지 남겼다.


에두아르 마네, 샤를 보들레르 장례식을 다룬 <매장>, 1867.


생 가티엥 마을 성당은 15세기 흔적이 겨우 남아있을 뿐, 19세기에 지은 교회 건축물이다. 역사적 유적이라고는 달랑 이 하나뿐인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잠자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 하지만 이 시골 마을의 성당이 예사롭지가 않다.


프랑스 대통령 엠마뉴엘 마크롱이 11월 만성절 휴가를 이용해 해마다 찾는 옹플뢰르 마을과는 달리 번뜻한 건물 한 채 없는 이 조그만 마을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찾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교황께서는 이웃해 있는 소화 데레사 성지인 리지외(Liseux) 마을을 찾았다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마을을 거쳐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곳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떠났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매년 11월 1일 만성절 휴가를 맞아 옹플뢰르를 찾는 프랑스 대통령 엠마뉴엘 마크롱 부부. 프랑스 저널에서 인용.


호텔에 오기 전 성당에 들러 아무리 둘러봐도 여행자의 시선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 노르망디 인들이 들어 올린 배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나무조각을 이어 붙인 천장 말고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성당에서 교황은 왜 무릎 끓고 기도까지 바친 것일까? 이 소박하고 투박하기까지 한 시골 성당이 교황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생 가티엥 데 부아(Saint Gatien des Bois)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생전에 프랑스 추기경이었던 인물이 장 마리 뤼스티제(Jean-Marie Lustiger)다. 뤼스티제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이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유대교 랍비였던 뤼스티제 집안은 독실한 유태인 가정이었다. 할아버지 때 자식들 교육 목적으로 프랑스로 이주해 온 뤼스티제 조부는 양말가게를 꾸려가면서 이민자의 가정을 힘겹게 이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뤼스티제 가족은 파리로부터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오흘레앙으로 피신한다. 유태인이었던 뤼스티제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밑의 누이와 함께 오흘레앙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독일군 점령기에 뤼스티제 모친은 가사도우미의 고발로 아우슈비츠 집단 학살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는데, 이때 받은 충격이 평생 뤼스티제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장 마리 뤼스티제


내 기억 속에 선명히 각인된 뤼스티제 추기경의 모습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모습보다는 성당밖을 출입할 때 타고 다니던 프랑스에서 제일 작고 형편없는 시트로엥 고물자동차를 손수 운전하면서 다니던 모습과 함께 우연히 기차역에서 마주친 추기경의 모습이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마중 나오지 않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보좌신부조차 거느리지 않고 홀로 쓸쓸히 지하철역 안으로 걸어가던 추기경의 뒷모습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물화가 되고 말았다.


물론 내 아내의 영세를 주관해 주신 분이시고 내가 수학(修學)한 파리 소르본느 대학 출신이라는 인연이 있긴 하나, 그런 부차적인 인연보다는 내가 실제 본모습이 훨씬 진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느 성직자보다도 검소한 모습이었으며, 청빈을 성직자의 삶 속에 실천한 이일 것이다.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소박하고도 꾸밈없는 미소를!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이 다름 아닌 뤼스티제 추기경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저는 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제 이름은 친할아버지 존함인 아론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믿음과 영세로 가톨릭 신자가 된 저이긴 하지만 사도들이 기억되는 한 유태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제 수호성인은 대사제 아론, 사도 요한,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 님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로부터 제139대 파리 대주교로 임명된 저는 1981년 2월 27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즉위하였고, 그 후 이곳에서 성직자로서의 제 모든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노트르담을 방문해 주신 여러분! 저를 위해 이곳에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듯 파리 노트르담 성당 안에는 장 마리 뤼스티제의 간절한 호소가 담긴 명판이 걸려있다.






[1]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김붕구 역주(譯註), 세계시인선 10, 민음사, 1988.


[2] 보들레르(Baudelaire), 『낭만주의 미술, 그 심미적인 취향(Curiosités esthétiques L’Art Romantique)』(앙리 르매트르(Henri Lemaitre) 서문, 보르다(Bordas), 1992)는 낭만주의 미술에 대한 샤를 보들레르의 예리하고도 직관적이며 심미적인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생 가티엥 데 부아 마을은 옹플뢰르로부터 약 9킬로미터 인근에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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