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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Apr 04. 2024

봄은 아프게 온다

몽생미셸 가는 길 180화


파리에서 캉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은 이른바 ‘바이킹의 길’이라 불리는 13번 고속도로(A13)다. 트루빌, 도빌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퐁레베크 인근의 호수를 지나게 되는데, 호수에 봄이 찾아왔다. 과수밭에는 봄꽃이 만발하고 호수는 더 푸르러질 것이다. 이 길을 오가다 보면 사계절을 다 보게 된다. 그 가운데 봄 풍경이 제일 아프게 다가온다. 겨우내 언 땅에서 자란 과수들이 힘겹게 꽃을 틔우는, 꽃을 틔워야 열매를 새로 맺을 수 있는 이 자연의 법칙이 내게는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또한 절박한 심정으로 봄을 노래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1]


어느 평자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현대시의 고전 ‘황무지’는 고대 성배(聖杯)의 전설을 제재로 한 자유시다. T. S.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1922)에 실렸다. 성배의 전설은 이렇다. 어부 왕(‘사람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이 저주를 받아 성(性) 불구자가 된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 기근이 들고 강은 메말라갔다. 저주를 풀기 위해선 마음이 순결한 기사(騎士)가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최후의 만찬 때 쓰였고, 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렸을 때 흘린 피를 받았다는)를 찾아야 한다.


만일 성배를 찾게 되면, 어부 왕은 건강을 되찾고 황무지는 다시 풍요로워진다는 전설이다. T. S. 엘리엇은 민간의 신화적, 종교적 맥락을 창작에 활용해 근,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허기와 갈망, 외로움, 무분별한 성(性)적 남용을 고대 황무지에 빗대어 그려냈다.” [2]


요약하면, 엘리엇의 『황무지』는 희망에 찬 삶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허기에 찬 갈망을 성배의 전설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 된다. 그 허기는 무엇이고 갈망은 어떠한 것인가? 외로움 또한 무얼 가리키는 것인가? 나는 되묻는다.


성배의 전설은 성배를 되찾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적 믿음에 훨씬 근접해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신화로부터 이어져온다. 삶과 죽음, 소멸과 탄생 등 우리에게도 이런 신화나 전설 속의 상징이 꽤 많이 존재한다.


상징(Symbol)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노학자 장-노엘 로베르는 “사실 고대 세계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알지 못했다”라고 전제하면서 “그림, 조각, 작품 등은 무엇보다도 말과는 다른 상징으로 표현되는 언어이며, 거의 언제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상징은 성스러운 것에 대한 직감을 표현하며, 보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의미 작용을 통해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며 상징이란 따라서  ‘잃어버린 낙원의 언어’라 정의한다.


“sumbolon이라는 그리스어는 첫 번째로 ‘확인 징표’를 의미한다. 이것은 남자들이 자기 자식들과 어떤 물건 하나를 잘라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두 조각을 붙여 봄으로써 ‘서로 상대방을 식별’하게 해준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조상 대대로 상대방을 환대하는 관습이 전해져 왔다. 마치 벽, 돌, 또는 천에 묘사된 어떤 그림이 부족한 부분, 곧 ‘확인 징표’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은 그것이 기억 속에 파묻혀 있었던 또 하나의 부분과 만나 돌연 이성을 뛰어넘은 대단히 강력한 어떤 상징적인 요소를 만들어 내면서 상징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상징이란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상징은 식별되는 것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3]


그는 “상징의 기원을 찾고, 아울러 그것이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비유적인 그림과 조각의 표현을 해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라며 상징에 대한 우리의 문맹을 진단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천을 짜는 “장인은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백지와 같은 비단을 아름답게 해서 보는 이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다양한 꽃, 기묘한 동물들, 풍경 등으로 비단을 정성껏 장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이나 직물을 짜는 장인들은 직물에 “어떤 의미를 담는다”는 것이다.


“어떤 망토는 아이네이아스가 저승에 내려간 것을, 또 어떤 망토는 구약 또는 신약의 어떤 장면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징체계에서 제일 중요한 상징은 “아마도 늠름하게, 인간이 그렇게도 원하는 영원불멸을 증명하기라도 매년 다시 살아나는 힘을 결합한 자연의 한 요소인 나무일 것이다.”


노학자의 말을 길게 인용해 보자.


“나무는 자주 등장하고, 수많은 신화나 성전이 이것에 최우선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드루이드교의 떡갈나무,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브로셀리안드의 숲, 로마신화의 로물루스의 무화과나무와 실바누스의 신의 성스러운 숲,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떡갈나무, 아폴론의 월계수, 붓다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 크메르 왕국의 앙코르 와트 유적에서 발견되는 부조, 영원불멸의 술을 주는 나무, 조로아스터의 나무 또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심었던 나무, 중국에서 우주를 떠받치고 있다는 나무, (동네 초입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등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록만큼이나 식물의 왕인 나무에게 부여된 의미도 끝이 없다.


나무의 상징을 설명하는 첫 번째 열쇠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초기 문명 시대의 인간은 그를 키워 준 자연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며, 인간에게 자연의 모든 부분은 신성불가침이다. 물론 자연은 다른 요소로도 구성되어 있으며, 그 모두가 천지만물의 상징적 언어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꽃, 물, 땅은 지구라는 이 자연의 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나무는 지구에 수직 방향으로 서 있기 때문에 상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특별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무는 우주의 여러 부분 사이의 관계를 체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 줄기는 하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그 뿌리는 땅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죽음의 왕국에 이른다고 라 퐁텐은 말하고 있다.)


모든 신화가 최초의 인간에 대해서 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 신화에서는 인간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신들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최초의 인간들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잘못을 저지르기 전까지 일이다. 모욕당한 신들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그들을 지상에 남겨둔 채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들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예컨대 샤먼 또는 몇몇 특권자만이 높은 곳에 있는 신들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고, 성스러운 존재의 대변자가 된다.


그런데 신과의 의사소통은 높은 곳에서 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데, 나무 꼭대기나 산 정상이다. 많은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샤먼은 이러저러한 특별한 나무 꼭대기, 또는 기둥 꼭대기로 기어오른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랐다. 올림포스 산, 타보르 산, 후지 산, 쿤룬 산(중국), 메루 산(인도), 포탈라 산(티베트), 등. 페르시아의 미세화, 중국의 그림, 그리스, 기독교, 유태교, 조로아스터교, 불교의 상당히 많은 문헌들은 이 산들을 신들이 사는 곳, 그렇지 않으면 천국의 문으로 묘사, 서술하고 있다.


산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세계의 축이며, 이 두 상징은, 브라만의 연꽃에 둘러싸인 나무가, 유명한 메루 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앙코르의 부조가 보여주는 것처럼 종종 혼동되고 있다. 나무는 세계의 중심이다. 예를 들면, 옆으로 누운 비슈누의 배꼽에서 나무 하나가 나와, 그 가지를 하늘 쪽으로 뻗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천지창조의 상징적인 표현에서처럼 때로는 그 자체가 우주의 축도(縮圖)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인의 ‘건목(建木)’도 역시 세계의 축이며, 그 9개의 뿌리가 죽은 이들이 머무는 9개의 샘으로 내려가고 있는 반면, 9개의 가지는 각기 하늘을 상징하는 9개의 계단에 닿아 있다.


어떤 표상은 나무의 주위에 동물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은데, 그 동물들 역시 예컨대 태양과 달 또는 황도 12궁을 상징하는 새처럼 우주적 규모를 띤다. 이렇게 산이나 나무는 우주 전체의 축도를 이루고 있지만, 전우주는 생명에 더욱 중요한 다른 요소에 의해서도 상징된다. 그것이 바로 사원(寺院)이다.” [4]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리면, 자연 풍경에 자리한 나무나 숲은 경전이나 문헌들, 종교 건축물들이나 제단화에서 보는 나무에 관한 상징들보다도 훨씬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 만물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퐁레베크 호숫가를 거닐며 바라보는 봄 풍경에는 그렇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수많은 사연들이 어른거린다. 세상 어느 만물이 사연이 없으리 마는 봄날이 되어 꽃을 틔우는 과수들 한 그루 한 그루 마다에도 사연이 묻어있을 것이다. 그 어느 생명보다도 봄이 왔음을 재빨리 알아챈 나무들 곁에서 깨닫는 봄이다. 그럼에도 봄은 아프게 온다.


퐁레베크 호수를 지나다 마주한 풍경을 여행수첩에 담다.






[1] T. S. 엘리엇, 『황무지』, 황동규 옮김, 세계시인선 17, 민음사.


[2] 김태완, 엘리엇의 「황무지」, 2020년 4월호 <월간조선>.


[3] 장-노엘 로베르, 『로마에서 중국까지』, 조성애 옮김, 이산.


[4] 같은 책, 285-286 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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